詩다움 5061

친구야, 나는...... /김상미

친구야, 나는...... 김 상 미 친구야, 나는 너희들이 좋단다 문 가까이 귀를 너무 바짝 대지 마 때로는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마음 베일 때도 있으니 내가 좋아하는 너희들의 지적 조심성으로 똑 똑 똑 두드리기만 해 그럼 나 문 열어줄게 문 안의 활력 다 보여줄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사시사철 뜨겁게 찻물 데워놓을게 우린 자꾸 나이들고 틀 속에 갇힐 때가 잦아지지 반쯤은 눈을 뜬 채 악몽을 꾸기도 하지 산발적인 쾌감을 때문에 아무 곳으로나 칼을 던지기도 하지 그러나 라일락 향기 밑이나 노랗게 은행나무 눈부시게 노래하는 길목에선 꼬옥 손을 잡지 숨지 마 돌아서지 마 당당히 당대의 핏줄답게 함께 걸어가자꾸나 나는 너희들이 좋단다 주머니 속에 꼭꼭 숨긴 은장도 나 빼앗지 않을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너..

詩다움 2023.03.05

아바타 [강기원]

아바타 강 기 원 자, 이제 골라 보시지 누구를 나로 택할 건지 이곳은 공간 없는 공간 육체 없는 육체 일단 밑그림을, 색깔도 좀 아, 그림자를 그려야지 잊지 말아야 할 데포르메 아무런 징후 없이 세상에 없는 나를 만드는 일 마초? 뱀파이어? 몬스터 고양이? 4차원 소녀? 무엇이든 설정은 '기쁨' 해독할 수 없는 눈빛 대신 방실방실한 웃음 내 어두운 바닥 감쪽같이 감춰 줄 오렌지색 아우라 낯선 이목구비 그리는 동안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담즙질 영혼 아이콘의 화색이 화사해지는 동안 창백해지는 내 낯빛 너는 그렇게 강림하고 나는 나를 잊고, 잃고 익명의 네가 살아 숨 쉬는 여긴 가상일까 현실일까 불현듯 실수인지 고의인지 눌러 버린 '삭제' 버튼 순식간에 사라진 건 너일까 나일까 _시집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詩다움 2023.03.04

청금석 [장옥관]

청금석 장 옥 관 돌. 어떻게 부를까 ' 파랗다'라고만 하면 말하지 않는 것에 불과해 '검푸르다'라면 더 가까운 걸까 그것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 흰 접시에 한 이틀쯤 쏟아놓은 잉크빛이라면 좀 더 가까울까 비유의 못 입은 돌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파랗지만 온전히 파란 것도 아닌, 새벽의 어스름과 사금(砂金)빛 가루가 옆구리에 점점이 묻어 있기도 한 돌, 응결된 슬픔이거나 모세가 걸어간 바닷길이라고 여기는 건 오로지 내 몫의 부지(不知) 문자로 짠 천 입고 춤추는 수피의 영혼 혹은 바람의 넋 '있음'으로 만날 수 밖에 없는 아무리 두드려도 들어가지 못하는 종교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는 그 돌 _《사람이 없었다고 한다》(문학동네, 2022)

詩다움 2023.01.16

죽음이 준 말 [손택수]

죽음이 준 말 손 택 수 조문을 가서 유족과 인사를 나눌 때면 늘 말문이 막힌다 죽음을 기다리는 병실에 병문안을 갈 때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쾌유를 빕니다 이런 유창한 관용구는 뭔가 거짓말 같은데 그럴 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내게 구박만 받던 관용구는 늙은 아비처럼 나를 안아준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도 좋으니 내 것이 아닌 말이라도 좀 흘러나왔으면 싶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말이 그치는 그때 어둠 속 벽을 떠듬거리듯 나는 말의 스위치를 더듬는다 그럴 때 만난 눈빛들은 잘 잊히질 않는다 그 눈빛들이 나의 말이다 _《어떤 슬픔들은 함께할 수 없다》(문학동네, 2022)

詩다움 2022.12.21

방문객 [정현종]

방문객 정 현 종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_시집 《광휘의 속삭임》(문학과지성사, 2008) ᆢ 정현종 이 詩,《방문객》은 요즘 같은 사람을 믿지 못하는 시대에 진중한 인간관계를 알려줍니다. 그 사람의 현재와 과거, 미래 그 일생이 왔다가 그 사람이 갈 때 그 모든 게 사라지지만 그래도 추억이 있어 필경 마음은 따뜻할 거에요. 오늘 아침 다시 이 詩를 읽으며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우주의 먼지, 티끌모다 못한 존재로 부디 ..

詩다움 2022.11.27

그렇게 우리는 안녕하다 [윤석정]

그렇게 우리는 안녕하다 윤 석 정 새 떼가 몰려가는 저녁 바람 떼가 이마에 달라붙는다 파도 떼가 발등에 감긴다 매일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부서질 듯 부서지지 않고 튕길 듯 튕기지 않는 말랑말랑한 마음의 벼랑 넓고 가파른 벼랑이 바다를 끌어안는다 우리는 벼랑을 딛고 선다 영영 우리가 가닿을 수 없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한 세기를 보내는 동안 빙빙 제자리만 돌고 돌았거나 반듯한 선로(線路)만 내달렸다면 우리의 벼랑은 없다 바람 떼가 달려들어도 파도 떼가 휘감아도 뜬눈으로 지새운 밤들 백만 번의 굽이마다 흠뻑 젖은 얼굴들 이 세계 저 세계를 넘나든 심장들 낮이고 밤이고 묻고 또 묻는 안부들 우리는 벼랑에 꼿꼿이 선 등대이니 좌표를 잃은 바람 떼에게 길을 내주고 높이를 잃은 파도 떼를 내치지 않고 낮게 나는 ..

詩다움 2022.11.09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며 [정호승]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며 정 호 승 바지락칼국수 국물 위로 떠오른 조갯살을 날렵하게 집어먹는다고 해서 내가 붉은어깨도요새가 될 수 있겠는가 바지락 조개껍질에 아직 남아 있는 갯벌의 잔모래를 씹어먹었다고 해서 잔모래에 아직 남아 있는 파도소리에 고요히 귀기울였다고 해서 내가 가슴붉은도요새의 가슴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먼저 썰물이 되지 않고서는 내가 먼저 새들이 자유롭게 발자국을 찍어대는 맛있는 갯벌이 되지 않고서는 어떻게 머루처럼 까만 민물도요새의 눈동자에 걸린 수평선이 될 수 있겠는가 이제 돌아가실 날만 남은 틀니뿐인 늙은 아버지와 자장면보다 맛있는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며 식탁 위에 젓가락으로 수북이 조개껍질을 쌓아놓았다고 해서 어떻게 내가 거룩한 패총이 될 수 있겠는가 _《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2..

詩다움 2022.10.17

일상 속에서 [정진규]

일상 속에서 정 진 규 아픈 것도 편안해야 한다. 편안하지 않다는 것의 수선스런 드러냄은 엄살이다. 감춤이다. 포즈다. 도구로 끝나는 도구는 몸이 아니다. 몸은 그런 짓을 본래부터 할 수가 없는 태어남이다. 알이다. 절대 수용이다. 이라는 말은 이완과 타성이라는 타기의 관습이 아니라, 그러한 타기의 관습조차 다 거쳐낸 다음에 생체 그 자체로 응집된 진실이다. 알이다. 초월을 꿈꾸는 자는 초월을 버린다. 궁핍한 시대에 좋은 시가 나온다는 말을 서둘러 쉽게 해서도 아니 된다. 그것 또한 궁핍이다. 그런 말에는 비켜가기가 있다. 교활함이 있다. 궁핍을, 그런 상처를 몸으로 체득한 자는 그런 말을 쉽게 하지 않는 법이다. 그저 속으로, 그 생체 속으로 들어가 세들어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고마운 일이어서..

詩다움 2022.10.17

사과밭을 지나며 [나희덕]

사과밭을 지나며 나 희 덕 가을엔 나비조차 낫게 나는가 내려놓을 것이 있다는 듯 부려야 할 몸이 무겁다는 듯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달았던 사과나무, 열매를 다 내려놓고 난 뒤에도 그 휘어진 빈 가지는 펴지지 않는다 아직 짊어질 게 남았다는 듯 그에겐 허공이, 열매의 자리마다 비어 있는 허공이 열매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빈 가지에 나비가 잠시 앉았다 날아간다 무슨 축복처럼 눈앞이 환해진다 아, 네가, 네가, 어디선가 나를 내려놓았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사과나무 그늘이 환해질 수 있을까 꿰맨 자국 하나 없는 나비의 날개보다 오늘은 내 百結의 옷이 한결 가볍겠구나 아주 뒤늦게 툭, 떨어지는 사과 한알 사과 한알을 내려놓는 데 오년이 걸렸다 _《어두워진다는 》(창비, 2001)

詩다움 2022.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