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서 정 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_《서정주 시집》(범우사, 2002) ᆢ ᆢ 눈이 부시게 푸르르다. 그래서 더 눈부시게 아프다. 詩다움 2023.05.03
서푼짜리 시 [박정대] 서푼짜리 시 박 정 대 세상이 거대한 관공서 같다면 관공서 문을 열고 햇살 환한 거리로, 광장으로 담배 피우러 나가듯 키르기스스탄으로 가자 그곳은 고독이 눈발로 흩날리는 곳 관공서의 문을 열면 거기는 이식쿨 호수 뜨거운 가슴들시 모여 있는 물의 광장 창문을 열고 키르기스스탄의 골짜기로 떨어지는 눈발굽의 소리를 듣자 바람이 몰고 가는 세상의 음원들 물음표 같은 우리 귓바퀴에 한 짐 가득 모아두고 기나긴 겨울밤이면 시래기 된장국 끓이듯 조금씩 끓어오르는 내면의 음원을 듣자 세상에서 내가 발견한 음원의 원소주기율표를 그리다 보면 새들이 몰려와 마음 가득 폐곡선을 그리며 지나가리니 고독은 한 양푼의 비빔밥 고독을 비벼 먹으며 한겨울을 나자 이상 기후의 날들 속에서도 나의 담배 연기는 오롯이 검은 밤의 비파를 연.. 詩다움 2023.04.26
이 봄의 평안함 [박형준] 이 봄의 평안함 박 형 준 강이나 바다가 모두 바닥이 일정하다면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깊이가 같을 것이다 그러면 나무의 뿌리가 땅 밑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허공을 물들이는 잎사귀의 춤 또한 일정할 것이다 저기 나무 속에서 사람이 걸어나오도록 인도하는 것이 봄이라면 마음속에서만 사는 말들을 꺼내주는 따뜻한 손이 또한 봄일 것이다 봄꽃들은 허공에서 우리를 기쁨에 넘쳐 부르는 손짓이며 누군가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면 우리 또한 그처럼 잊힌 누군가를 향해 가리라 _《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창비, 2020) 봄날은 간다, 여름은 오고, 누군가 봄날처럼 그렇게 떠날 것만 같아서 슬픈 봄날이다. 봄의 평안함 또한 묻히고 있다. 詩다움 2023.04.24
꽃들에게 바침 [최삼용] 꽃들에게 바침 -세월호 추모시 비통함에 이 나라 산 자들은 모두가 운다 하늘 끝 모서리에 초라히 달린 쪽달도 오늘은 서러워서 허리 굽혔구나 그러나 세상이 오열한들 억울한 울음만은 길길이 비켜 가는데 세월아, 너만 가지 꽃다운 생들을 왜 데리고 갔느냐 삼백 넷 꺾어진 꽃송이에 나붙은 노란 리본 줄줄이 엮어 깊고 검은 진도 바다 뻘에 박힌 영혼, 씻김굿으로 건져도 초혼마저 못 아뢴 무너진 억장은 맹골수도 가파른 물길만큼 슬픔 되어 번지고 남은 자의 애절한 가슴을 두드릴 북 만들어 울려도 아기 새 울음은 멎어 희망에 걸던 약속 따윈 거짓이 되었구나 핏발 선 절규마저 떠나는 마지막 길에 진혼곡 되지 못한 지금 4·16 그날은 차라리 봄 중에 꾼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부레 없어 멈춘 힘없는 호흡들아! 거친 바다 박.. 詩다움 2023.04.16
나는 기쁘다[천양희] 나는 기쁘다 천 양 희 바람결에 잎새들이 물결 일으킬 때 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신비의 깊이를 느꼈을 때 혼자 식물처럼 잃어버린 것들과 함께 있을 때 사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을 때 욕심을 적게 해서 마음을 기를 때 슬픔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울 때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올 때 무언가 잊음으로써 단념이 완성될 때 벽보다 문이 좋아질 때 평범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을 때 하늘이 멀리 있다고 잊지 않을 때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나는 기쁘고 막차 기다리듯 시 한 편 기다릴 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 _《새벽에 생각하다》(천양희, 2017) 詩다움 2023.03.29
봄길 [정호승] 봄길 정 호 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_정호승 시선집《내가 사랑하는 사람》(비채, 2021) 詩다움 2023.03.27
봄밤이다 1 /장옥관 봄밤이다 1 장 옥 관 돼지가 생각나는 봄밤이다 돼지감자가 땅속에서 굵어가는 봄밤이다 시커먼 돼지들이 벚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는 봄밤이다 하이힐을 신은 돼지 뻣뻣한 털로 나무 밑동을 자꾸 비벼대는 봄밤이다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여린 꽃잎은 돼지의 콧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 천 마리 만 마리 돼지들이 골목을 쑤시다가 캄캄한 하수구로 흘러드는 봄밤 풀어놓은 돼지들을 모두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띄우고 싶은 봄밤이다 _《사람이 없었다고 한다》(문학동네, 2022) ᆢ 어제는 목련의 속삭임이 더 많아지는 봄밤이었다. 누가 누가 더 자랐을까 오늘은 그 목련의 머리를 헤아리는 아침이다. 詩다움 2023.03.21
봄 [이성부] 봄 이 성 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한국현대대표시선 Ⅱ》(창비,1992) 詩다움 2023.03.17
운주사(雲住寺)/시바타 산키치 운주사(雲住寺) 시바타 산키치 붉게 익은 고추가 바람에 흔들리는 눈이 닿는 한 끝없이 펼쳐진 고추밭은 석양에 불타는 구름 같다 운주사로 오르는 오솔길을 바람에 이끌려 드문드문 비치는 사람 그림자와 함께 간다 천의 탑, 천의 돌부처가 이 들판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햇빛 아래, 부처의 등이 깨어지고 얼굴은 잘려서 떨어져 나가 풀숱에 잠들어 있다 9층이었던 석탑도 7층으로 하늘이 무너뜨린 것인가 사람이 무너뜨린 것인가 기단에 걸터앉아 광주에서 온 노인들이 차를 마시고 있다 "이것도 부처님, 저것도 부처님입니다" 사방에 흩어진 돌조각들을 가리키며 오래된 일본어를 기억해 내면서 가르쳐 준다 이것도 부처님? 밟고 왔던 풀 속에서 돌조각을 하나 줍는다 이제 상처는 치유되었을까 안으로부터 마멸된 돌은 뜻밖에 가볍다 일.. 詩다움 2023.03.06
무논에 백일홍을 심다 [장옥관] 무논에 백일홍을 심다 장 옥 관 무논에다 나무를 심은 건 올봄의 일이다 벼가 자라야 할 논에 나무를 심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다 수백 년 도작(稻作)한 논에 나무를 심으면서도 아버지와 한마디 의논 없었던 건 분명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장남인 내게 일언반구 없이 여길 훌쩍 떠나지 않으셨던가 풀어헤친 제 가슴을 헤집던 아버지 손가락의 감촉을 새긴 논은 이제 사라지겠지만 남풍에 족보처럼 좍 펼쳐지던 물비린내 나는 초록의 페이지 덮고 올봄엔 두어 마지기 논에 백일홍을 심었다 백일홍 꽃이 피면 한여름 내내 붉은 그늘이 내 얼굴을 덮으리 백날의 불빛 꺼지고 어둠 찾아오면 사방 무논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 나는 북 카페를 낼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북 카페를 열 것이다 천 개의 바.. 詩다움 2023.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