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5061

시월의 사유 [이기철]

시월의 사유/이기철 저 내림이 죽음이 아니라는 걸까 길어 올린 주황이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잎새들은 햇빛으로 몸을 씻는다 바람이 들판에 새 길을 내고 뿌리들이 땅 속에서 다친 발을 만질 때 흙들도 이제는 쉬어야 한다 하늘이 그 큰 원고지의 빈칸마다 파란 시를 쓸 때 단맛으로 방을 채운 열매들이 무거워진 몸을 끌고 땅으로 돌아온다 내년을 흔들며 떨어지는 잎새들 몇 천 번 화염에 데인 단풍의 불에도 산은 제 뼈를 꼿꼿이 세우고 사원은 고요함으로 그늘을 밝힌다 불타는 것을 절정이라고 말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통의 빛깔인 저 환함 이제 영원의 모습은 추상이 아니다 나무들은 젖은 몸을 말리느라 등성이로 올라가고 짐승들은 따뜻한 곳을 찾아 낮은 곳으로 내려온다 익는 것이 전부인 시월 시월은 시월의 ..

詩다움 2022.10.02

시월 [김은경]

시월 김은경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이에요 대추나무는 대추알과 은행나무는 은행알과 지상의 모든 열매는 눈물방울 같아요 나는 대추나무 나는 은행나무 나는 감물 번진 노을 밑에서 홀로 서서요 팔이 떨어져 나간 사람은 팔이 있다는 착각을 하며 내내 살듯이 살 빠진 사람들이 두 개의 영혼을 갖고 살듯이 지난 가을 스웨터를 입고 상실감을 상실하는 나무가 되는 꿈을 꾸어요 알아요, 당신? 모든 나무의 눈물주머니 속엔 열매가 살아요 고욤나무의 고요를 자작나무의 한숨을 환희라는 꽃말을 가진 자귀나무의 역설을 빗방울처럼 받아먹는 저녁이에요 _《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실천문학사, 2018)

詩다움 2022.10.02

시월 [이문재]

시월 이 문 재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버린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ㅡ《마음의 오지》(문학동네, 1999)

詩다움 2022.10.01

안녕에 대하여 [여태천]

안녕에 대하여 여 태 천 내가 뭘 동의했는지 모르겠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걸려 오는 전화.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해서 낮고 조용히 파고드는 목소리.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동의서 얘기도 하고 거기에 내가 동의했다고도 하고 그래서 이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고 복음 전하는 목소리. 내가 수줍음을 많이 타는 걸 알고 있는 친구일까. 아니면 일면식 없는 동사무소나 세무서 직원일까. 제대 말년까지 괴롭히던 눈이 찢어진 이 병장이라면, 나는 그만 덜컥 겁이 난다. 이렇게 아무도 만나지 않고 꽁꽁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이 무서워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나를 도대체 저이들은 어떻게 알아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몇 날 며칠을 생각해도 곰곰이 또 생각해도 나는 무섭다 무섭기만 하다. 안녕하시냐니? 사람이 죽어도 눈도 ..

詩다움 2022.09.30

그날의 구두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신철규]

그날의 구두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신 철 규 면도를 할 때마다 깎여나가는 감정들이 있다 나는 거울을 보며 턱을 쓰다듬는다 입술이 시리다 부드러운 계절은 갔다 지하에 있는 장례식장 빛과 함께 열기가 흘러나온다 형광등 빛이 면사포처럼 내려와 사람들의 얼굴을 노랗게 물들인다 벽에 비친 그림자들이 흐리게 일렁인다 몇은 낙엽처럼 웃고 몇은 메마른 가지처럼 몸을 떤다 웃음과 울음이 섞인 얼굴로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술잔을 건넨다 마주 앉은 사람의 표정에서 나의 표정을 떠올린다 가끔은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느라 입을 다문다 말은 얇은 막이 되어 우리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을 가린다 신발을 바꿔 신고 간 사람은 있는데 신발 주인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실내화를 자기 신발이라고 착각하고..

詩다움 2022.09.29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송재학]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송 재 학 아침을 담는 항아리는 천 개의 색을 모으는 중이다 무채색 주둥이까지 포함하니까 구부리고 번지는 밀물까지 돌과 함께 물렁해져서 어딘가 스며들어야 하는 해안선이 되었다 소년의 표정이 왔다 하늘가에 인기척이 수런거리더니 아침 식탁에 별자리를 펼치는 리넨 꽃 사이에 꽃의 생활을 심고 돌 속에 다시 돌을 옮긴다 꽃은 희고 돌은 검다가 둘이 합쳐서 가슴까지 검푸르다 비거스렁이 하품과 거품이 썰물을 부추기며 무시로 글자를 쓰다 지운다 싶은데 동심원이 모였다 물의 관습이라는 결혼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물기 흥건한 계절이 아니라면 여기 오래 머물겠지만 이름을 잊었기에 무엇이나 포옹하는 이 아침의 역광을 어디 눈썹 없는 기별만 탓하랴 십 년 후를 만날 때까지 물결이 굳어질 때까지 ..

詩다움 2022.09.29

구름의 제국 [김선재]

구름의 제국 김 선 재 다가서면 물러서고 물러서면 다가서는 그것이 물을 읽는 법이라고 말할 때, 바리안나무 뿌리 한 뼘이 지상으로 내려서던 것을 기억한다 빛바랜 군도들이 밀물에 잠겨갈 때 너는 소문 없이 한 발 물러서서 산을 넘어가고 비껴가던 날개들이 엉켜 적운이 솟고 천 개의 문 뒤에서 하늘 가득 바람을 널어 말리니 햇볕이 시들고 젖은 옷깃도 따라 식어, 열린 하늘을 돌아보는 동안 무적(霧笛)들이 파도가 되어 돌아온다 지상을 뛰쳐나간 새와 자오선을 넘어가는 바람은 알겠지 사람의 체온은 한사코 수평이 되려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너에게 다가서다가 또 물러서다가 잠이 들거나 물살에 담긴 말을 읽다가 흘려보내거나 지구는 다시 저물어 온 곳으로 되돌아가고 나는 아직 기억해 다가서면 물러서고 물러서면 다가오는..

詩다움 2022.09.27

숨 [진란]

숨 진란 미운사람 없기, 지나치게 그리운 것도 없기, 너무 오래 서운해하지 말기, 내 잣대로 타인을 재지 말기, 흑백논리로 선을 그어놓지 말기, 게으름피우지 말고 걷기, 사람에 대하여 넘치지 말기, 내 것이 아닌 걸 바라지 말기, 얼굴에 감정 색깔 올려놓지 말기, 미움의 가시랭이 뽑아서 부숴버리기, 그냥 예뻐하고 좋아해 주고 사랑하기, 한없이 착하고 순해지기 바람과 햇볕이 좋은 날 자주 걸을 것 마른 꽃에 슬어 논 햇살의 냄새를 맡을 것 그립다고 혼자 돌아서 울지는 말 것 삽상한 바람 일렁일 때 누군가에게 풍경 하나 보내줄 것 잘 있다고 카톡 몇 줄 보낼 것 늦은 비에 홀로 젖지 말 것 적막의 깃을 세우고 오래 걸을 것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시인동네, 2022)

詩다움 2022.09.25

11월 [신철규]

11월 신철규 같은 숫자가 나란히 서 있다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사선으로 비친다 너의 왼뺨에 난 솜털이 하늘거리고 오른뺨은 그늘로 선명해진다 나는 조금 더 햇볕 쪽으로 다가앉는다 첫눈 오면 뭐 할 거야. 그것이 사랑의 속삭임인지 이별의 선언인지 헷갈려서 심장이 아래로 한 치쯤 내려앉는다 몸속의 저울추가 무거워진다 파동처럼 흐르던 마음이 입자가 되어 흩어진다 실내엔 아지랑이처럼 음악이 피어오른다 고요하던 실내에 음악이 켜지면 실내는 그만큼 무거워질까 소리에도 무게가 있을까 흘러간 시간들은 어디에 쌓이는 걸까 그거 알아? 열대지방에도 단풍이 든대. 건기 때 낙엽이 지는데 추위 때문이 아니라 공기가 건조해져서래. 나무는 몸 안에 깃든 물을 가두기 위해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낀 태양 나뭇가지..

詩다움 2022.09.25

가을 나무 [이병률]

가을 나무 이 병 률 뭔가를 정하고 싶을 때나 뭔가를 정할 수 없을 때 나뭇잎의 방향을 보라 나무가 잎을 매달고 잎을 떨어뜨려 흩뿌리는 계절엔 다 이유가 있으니 뭔가를 알고 싶을 때도 알아야 하는 것이 진실이 아닐 때에도 새가 열매를 물고 날아가는 그쪽 방향을 보라 나뭇가지에 열매를 매다는 것에도 할말이 있으니 가을 한철의 그리움들은 힘을 놓고 끊어진 힘들은 다시 어느 한곳에 모여 나무로 자랄 것이니 부디 하고 싶은 것이 있거나 하고 싶은 것들을 조용히 거둘 때도 나무뿌리 가까이에 심장을 대보라 흙으로 덮이면 덮일수록 뿌리는 내리고 내려 가닿는 데가 닿을 데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 그러니 기차가 떠나버렸거나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을 때에는 겨울 할아버지 앞으로 몰려가 수북이 질문을 하는 나뭇잎의 흩어지..

詩다움 2022.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