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5061

놀다 [정현종]

놀다정 현 종괴로움을 견디느라 괴로움과 놀고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그러다가노는 것도 싫어지면싫증하고 놀고……_《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문지, 2022)ㅡㅡ"1978-2024 이어질 시의 모험"1978년 황동규의 를 시작으로 출발한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시적 여정이 2024년 600호에 도달했다. 테두리를 색으로 감싼 길쭉한 사각 프레임, 2024년에 시를 읽는 독자의 눈으로 봐도 어색함이 없는 故오규원 시인의 디자인을 근간으로 계속될 시의 모험을 기대하며 시인선 600번 기념 시선을 맞는다. 표지 뒷면에 놓이는 '시의 말'이 그 주인공이다.―알라딘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책소개 글에서.ㆍ시는 과거나 현재에 관해 말하는 순간에도 이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미래의 타자를 향해 말을 건넵니다...

詩다움 2024.04.27

갠지스 [박형권]

갠지스박 형 권문을 열 때 한 처녀가 꽃 한 다발을 들고 난감해 있다꽃 한 다발 어울리게 들이지 못하는 내 혈관으로 부끄러운 가난이 역류한다너무 과분한 꽃을 두고 가는 처녀에게나는 편지를 한다장밋빛정이에게 편지를 한다다시 꽃필 수 없는 내 스무 살과 지금 꽃피는 그녀의 스무 살 사이에강이 흐른다꽃보다 쌀을 가져올걸 하고 눈물짓는 처녀와 쌀보다꽃을 가져온 게 좋았다고 생각하는 나 사이에갠지스가 흐른다그날편지를 한다지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다 실패한한 발자국 앞의 연민에게_《내 눈꺼풀에 소복한 먼지 쌓이리》(걷는사람, 2023)

詩다움 2024.04.26

공룡 같은 슬픔 [강우근]

공룡 같은 슬픔강 우 근다 똑같은 공룡은 아닐 것이다오르니톨레스테스는 날아다니는 곤충을 사냥했다고 하지만날개를 가진 곤충에게 이름을 지어주며둘도 없는 친구가 된 오르니톨레스테스도 있을 테니까우리들 중 누구도영원히 인류에게 기억될지도 모르지우리의 목은 점점 뻣뻣해지고발걸음은 무거워지고 있지그러니까 지금부터아무도 모르는 행동을 해보자주말 아침에 깨어나하품을 백번쯤 하고열가지 방식으로 귤을 까먹고오지로 산책을 나서고수액을 찾으러 나무에 오르는개미와 뜻 없이 인사를 나누자너무 크고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을한눈에 보기 위해 지금도 누군가는 모형을 만들고 있지우리가 만든 지구본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동상이 온화한 미소를 견디고 있는 것처럼몇억년 전에 멸종된 공룡은열대어가 사는 어항의 장식으로, 초등학생의 가방 고리로,..

詩다움 2024.04.26

벚꽃 잘 받았어요[김선우]

벚꽃 잘 받았어요 김 선 우 이 봄에 아픈 내가 꽃을 놓칠까봐 당신이 찍어 보내온 활짝 핀 벚꽃 영상 여린 꽃들 피어 무거운 가지 들어 올리는 저 힘 어디에서 왔나? 몇뼘 둘레와 몇자 키와 몇근 무게로 측정될 벚나무 속에 두근거리는 저 기운은 벚나무 형상 속, 벚나무 형상 너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 무언가 꽃으로 밀려와 오늘 당신과 섞였구나 활짝 핀 꽃나무 아래에서는 마음 섞이는 일이 몸 섞는 일이구나 기운을 내요 전해오는 당신의 마음 향기로운 살을 받아먹는다 응, 기운 낼게요 - 《내 따스한 유령들》(창비, 2021)

詩다움 2024.03.31

공전 [고영민]

공전 고 영 민 자면서 그대가 나에게 다리를 올려놓는 시간 내가 이불을 당겨 그대의 배를 덮어주는 시간 아무 것도 모른 채 쿨쿨 자는 시간 밤새 무거운 머리를 들고 있는 베개처럼, 읽다가 머리맡에 엎어놓은 책처럼 죽은 그대가 뜬눈으로 내 옆에 일년을 앉아 있는 시간 자다 말고 일어나 그대가 몇모금 목을 축이는 시간 습관처럼 자는 척하는 시간 또 저물듯 시간이 몸을 지나가고 구들이 식고 그대 잠 속으로 다시 천천히 숨어드는 시간 문득 내 살던 집의 팽나무가 보고 싶은 시간 병든 아버지의 이마를 짚어주는 시간 산란을 위해 옴두꺼비가 느리게 국도를 건너는 시간 내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간 이유 없이 등 뒤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 공기가 벙긋이 웃는 시간 지구가 천천히 돌아가는 시간 _《사슴공원에서》(창비..

詩다움 2024.03.30

목련이 환해서 맥주 생각이 났다[김서현]

목련이 환해서 맥주 생각이 났다 김 서 현 집 앞에 의자를 내놓았다 목련 꽃잎이 긴 머리카락에 떨어졌다 멈출 수가 없어서 떨어졌다 봄입니까, 라고 말을 하려던 입술이 벌어졌다 손각지를 꽉 끼고 걸었던 그 거리 다시 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부어오른 목련 꽃잎 같아 지그시 눌러보았다 온종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꽃잎 부풀리는 일 말고는 이 봄에 다시 만나게 될 너는 어떤 표정일까 저녁을 말리는 목련을 보며 너의 어떤 표정을 생각했다 하루라도 봄이 있었던 날은 없었다 - 《목련이 환해서 맥주 생각이 났다》(달아실, 2023) ᆢ 목련 고운 날, 밤산책. 밤이 주는 매력 목련의 꿈은 밤에 완성되는 듯^^

詩다움 2024.03.29

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

단추를 채우면서 천 양 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_《오래된 골목》(창비, 1998)

詩다움 2024.03.12

가을에 [정한모]

가을에 정 한 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이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 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했던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라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

詩다움 2023.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