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5061

드라이플라워 [김안녕]

드라이플라워 김 안 녕 손을 뻗어 만지면 모래 알갱이 같은 시간이 쏟아질까 봐 너무 아름다운 것은 허명 같아서 저토록 단호한 침묵은 절규와 통하는 언어일 것이다 꼿꼿하게 물구나무 서 있다 새삼스레 피가 거꾸로 솟을 일도 없겠다 내다 버리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고 겨우내 방에 갇혀 시체와 함께 살았다 _《사랑의 근력》(걷는사람, 2021)

詩다움 2022.10.15

가을 어록 [이기철]

가을 어록 이 기 철 가을 어록 이 기 철 ​백 리 밖의 원경이 걸어와 근경이 되는 가을은 색깔을 사랑해야 할 때이다 이 풍경을 기록하느라 바람은 서사를 짜고 사람은 그 서사를 무문자로 읽는다 열매들은 햇살이 남긴 지상의 기록이다 작은 씨앗 하나에 든 가을 문장을 읽다가 일생을 보낸 사람도 있다 낙과들도 한 번은 지상을 물들였기에 과일을 따는 손들은 가을의 체온을 느낀다 예감에 젖은 사람들이 햇살의 방명록에 서명을 마치면 익은 것들의 육체가 고요하고 견고해진다 결실은 열매들에겐 백 년 전의 의상을 꺼내 입는 일 그런 때 씨앗의 무언은 겨울을 함께 지낼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내 시는 씨앗의 침묵을 기록하는 일 바람이 못다 그린 그림을 없는 물감으로 채색하는 일 _《나무, 나의 모국어》(민음사, 2012)

詩다움 2022.10.14

작은 신이 되는 날 [김선우]

작은 신이 되는 날 김 선 우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먼지 한점인 내가 먼지 한점인 당신을 위해 기꺼이 텅 비는 순간 한점 우주의 안쪽으로부터 바람이 일어 바깥이 탄생하는 순간의 기적 한 티끌이 손잡아 일으킨 한 티끌을 향해 살아줘서 고맙다, 숨결 불어넣는 풍경을 보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날 _《내 따스한 유령들》(창비, 2021)

詩다움 2022.10.13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박세랑]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박 세 랑 난 웃는 입이 없으니까 조용히 흘러내리지 사람들이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 더 아프려고 밥도 꼬박꼬박 먹고 알약도 먹어 물처럼 얼었다 녹았다 반복되는 하루 친구라도 만들어야 할까? 우동 먹다 고민을 하네 무서운 별명이라도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 약 먹고 졸린 의자처럼 찌그덕삐그덕 걷고 있는데 사람들은 화가 나면 의자부터 집어던지네 난 뾰족하게 웃는 모서리가 돼야지 살아본 적 없는 내 미래를 누가 부러뜨렸니! 약국 가서 망가진 얼굴이나 치장해야지 뒤뚱뒤뚱 잘못 걸어야지 난 은밀한 데가 조금씩 커지고 있어 몸은 축축해 곰팡이가 넘치는 벽이 되려고 해 사람들이 깨트리기도 전에 계란프라이처럼 하루가 누렇게 흘러내리고 탱탱하게 익어가는 구름들아 안녕 누가 좀 만져주면 좋..

詩다움 2022.10.10

눈물이 저 길로 간다 [김사인]

눈물이 저 길로 간다 김 사 인 눈물이 저 길로 간다 슬픔 하나 저 길로 굴러간다 물 아래 물 아래 울음이 간다 찔레꽃 한 잎 물 위에 흘러간다 오늘 못 가고 내일 내일 못 가고 모레 글피 글피 아니고 아득한 훗날 그 훗날 고요한 그대 낮잠의 머리맡 수줍은 채송화꽃 한 무더기로 저 길로 저 길로 돌아 내 눈물 하나 그대 보러 가리 그대 긴 머리칼 만나러 가리 서늘한 눈매 만나러 가리 오늘 아니고 어제 어제도 훨씬 아닌 전생의 어느 날 눈물은 별이 되어 멀리로 지고 손발 없는 내 설움 흰 눈 위로 피울음 울며 굴러서 간다 _《밤에 쓰는 편지》(문학동네, 2007) ᆢ 눈물이 난다. 크게 소리내어 울 수도 없다. 비도 내리니 더 눈물이 난다. (-.-)(-.-)

詩다움 2022.10.09

우체국에 가면 [이성미]

우체국에 가려면 이 성 미 오늘도 우체국에 가지 않았다. 하루는 눈이 내렸고 하루는 아팠다. 하루는 늦잠에서 깨어 우체국이 너무 멀다는 생각을 했다. 우체국 대신 철물점에 가서 파이프를 샀다. 하루에 하나씩. 하루는 파이프로 피리를 불었고 하루는 파이프를 이어 좀 더 긴 피리를 만들었다. 하루는 이러다가 파이프로 오르간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봉투에 적는 주소가 하루마다 길어졌다. 한 글자 더/ 한 줄 더/ 번호가 더/ 주소가 길어져서 봉투를 더 주문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터널을 통과하고 내리막길을 내려가 우체국까지, 투명한 길을 그었다. 어제 우체국이 있던 자리에 오늘 우체국이 있어야 하는데 그곳에는 우체국이 없다. 또 하루가 지났기 때문에 우체국은 내게서 더 먼 쪽으로. 하루만큼 더 먼 ..

詩다움 2022.10.08

시인의 말/ 이성미

사과에 대해 쓰기 이 성 미 9월의 첫날이 오면 과일에 대해 글을 써야지 맛있고 빨간 사과는 백설공주를 위해 남겨두고. 계모가 손대기 전의 사과에 대해. 사과가 익기 전에. 과즙이 흘러나오기 전에. 하얀 이빨이 사과에 박히기 전에. 사과에 대한 글을 끝내야지. 모든 사과 말고. 천천히 익어가는 느린 사과에 대해. 익기 전에 떨어져 뒹구는 사과에 대해. 더 맛있어지고 더 커지는 사과 말고. 높고 단일한 사과 말고. 가을의 기울어진 햇빛 아래에서. 사과가 되려 했지만. 사과가 되지 못한 사과의 경우에 대해 쓰고. 제목을 사과라고 붙여야지. 사과나무의 가느다란 가지에 대해 써야지. 나무를 받치는 파이프도. 파이프 옆 사과향기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사과를 매달고 있는 나무가 쓰러지기 전에. 모자를 쓴 사람들이..

詩다움 2022.10.08

인생공부 [유하]

체중계의 바늘이 0을 가리키는 내 몸무게에 깜짝 놀라 당장 시작한 벤치 프레스 하나 하나 늘려가는 바벨의 중량 덕분에 풍선 바람 나가듯 빠지는 살도 살이지만 신기하여라 그 무심한 쇳덩어리들이 손 시린 인생공부를 시킨다 새로운 무거움을 접하며 비로소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전 단계의 무게에서 깔짝깔짝 역기를 농락하던 나는 얼마나 초라한 비계덩어리에 불과했던가 바벨을 하나 하나 늘릴 때마다 나의 자만은 살이 빠지듯 내 몸을 서서히 빠져 나간다 가령 바벨을 늘리지 않고 그 다음 단계의 무거움을 짐작하는 자들처럼, 살고 있는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듣는 귀가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이 들어올리는 타성에 젖은 중량의 권위로 쉽게 잴 수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 새..

詩다움 2022.10.05

시의 맛 [김안녕]

시의 맛 김 안 녕 장독대 속 묵은 김치를 죽죽 찢어 빨아 본다 여물어 터질 것 같은 여름이 섰는 포도원의 알을 깨물어 본다 봉숭아 물들인 손톱 그 안에 갇혀 있는 달 한 조각을 새벽 다섯 시 아직 깨지 않은 하늘을 아윈 그림자 비친 우물물 한 모금을 돌이켜 본다 어떤 암흑 속에서도 결코 신으로부터 구원받지 않겠어, 그걸 유일한 자부심으로 삼는 시인들이 우주 밥상에 그득하다 _《사랑의 근력》(걷는사람, 2021) ᆢ 우주 밥상에 그득한 시인들, 그들 중에 안부를 묻는 유일한 시인인 김안녕 시인! 저에게 있어서는 늘 다정한 이름인 "오래된골목"님.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그 다정한 시의 맛은 김치를 쭉쭉 찢어 먹는 손맛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김장김치를 해주던 엄마의 손맛이 그리워집니다. 그리운 손..

詩다움 2022.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