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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한다는 것 [류근]

최선을 다한다는 것 류 근 대부분의 파도는 육지에 닿기 전에 몸을 잃는다 살아서 오는 파도보다 푸른 해면에 제 흔적을 놓쳐버린 채 죽어버리는 파도가 더 많다 몸을 데리고 육지에 오르는 파도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의 자세를 잘 익혔다 나는 그것에 대해 일찍이 들어본 바가 없었으나 몸을 잃고 돌아서면서 파도는 내게 삼진 아웃 당하고 돌아서는 타자처럼 말했다 나는 여기서 멈추기 위해 달의 힘까지 빌려 몸을 일으켰으나 육지에 몸을 더럽히지 않은 것으로 나의 길을 잘 마쳤다! 파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파도의 굳은살이 조금 보이는 것 같았다 _《어떻게든 이별》(문지, 2016) 오늘도 파도의 이야기를 들으며, 최선을!!

詩다움 2023.06.15

6월, 가뜩하여라[한영옥]

6월, 가뜩하여라 한 영 옥 멀리 계시던 당신들 우르르 오신다 은사시나무에게 오시는 은사시의 당신, 자작나무에게 오시는 자작의 당신, 미루나무에게 오시는 미루의 당신, 옷깃 느슨히 오시는 당신들께 안기는 소리, 살폿 살폿 은사시, 자작, 미루들이 우르르 깨어나는 참 소리, 참 바람 가뜩하여라 좋은 바람, 6월. _《아늑한 얼굴》(랜덤하우스중앙, 2006)

詩다움 2023.06.04

가을 어록 [이기철]

가을 어록 이 기 철 가을 어록 이 기 철 ​백 리 밖의 원경이 걸어와 근경이 되는 가을은 색깔을 사랑해야 할 때이다 이 풍경을 기록하느라 바람은 서사를 짜고 사람은 그 서사를 무문자로 읽는다 열매들은 햇살이 남긴 지상의 기록이다 작은 씨앗 하나에 든 가을 문장을 읽다가 일생을 보낸 사람도 있다 낙과들도 한 번은 지상을 물들였기에 과일을 따는 손들은 가을의 체온을 느낀다 예감에 젖은 사람들이 햇살의 방명록에 서명을 마치면 익은 것들의 육체가 고요하고 견고해진다 결실은 열매들에겐 백 년 전의 의상을 꺼내 입는 일 그런 때 씨앗의 무언은 겨울을 함께 지낼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내 시는 씨앗의 침묵을 기록하는 일 바람이 못다 그린 그림을 없는 물감으로 채색하는 일 _《나무, 나의 모국어》(민음사, 2012)

詩다움 2022.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