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5061

생일 [오은]

생일 오은축하해앞으로도 매년 태어나야 해 매년이 내일인 것처럼 가깝고내일이 미래인 것처럼 멀었다 고마워태어난 날을 기억해줘서 촛불을 후 불었다몇 개의 초가 남아 있었다 오지 않는 날처럼하지 않은 말처럼 죽을 날을 몰라서차마 꺼지지 못 한 채 _《왼손은 마음이 아파》(현대문학, 2018) ......부재 앞에,두 번의 탄생일을 맞이했습니다.챙겨주신 따뜻하고 고운 마음들, 넘치는 애정들을깊이 간직하며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힘들 때위로가 필요할 때차 한 잔이 그리울 때저를 찾으시면 저도 받은 마음 그대로 전해 보겠습니다.감사와 애정을 보냅니다.고맙습니다^^

詩다움 2025.03.08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허 수 경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

詩다움 2025.02.26

봄바람, 은여우 [이은봉]

봄바람, 은여우이 은 봉봄바람은 은여우다 부르지 않아도 저 스스로 달려와 산언덕 위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은여우의 뒷덜미를 바라보고 있으면 두 다리 자꾸 후들거린다 온몸에서 살비듬 떨어져 내린다 햇볕 환하고 겉옷 가벼워질수록 산언덕 위 더욱 까불대는 은여우 손가락 꼽아 기다리지 않아도 그녀는 온다 때가 되면 온몸을 흔들며 산언덕 가득 진달래꽃 더미, 벚꽃 더미 피워 올린다 너무 오래 꽃 더미에 취해 있으면 안 된다 발톱을 세워 가슴 한쪽 칵, 할퀴어대며 꼬라지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질투심 많은 새침데기 소녀다 짓이 나면 솜털처럼 따스하다가도 골이 나면 쇠갈퀴처럼 차가워진다 차가워질수록 더욱 재주를 부리는 은여우, 그녀는 발톱을 숨기고 달려오는 황사바람이다. _《봄바람, 은여우》(도서출판 b, 2016)

詩다움 2025.02.25

흰 숲 [이은규]

흰 숲 이 은 규 나무의 이름 안쪽에는자작자작 모닥불 소리가 잠들어 있고 오래전 북방의 시인은온통 자작나무다, 라는 문장을 썼다행간 사이로 눈발이 내리면세상이 금세 흰 종이로 변할 것만 같은데 추운 바람으로부터 부름켜를 지키기 위해나무는 종이처럼 얇은 껍질을 겹겹이 두르고 있다마음만은 얼지 않도록 부둥켜안았던 우리처럼두꺼운 외투보다 모닥불보다, 포옹 가만가만 눈내리는 동안세상은 온통 내재율로 가득하다언젠가 당신은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경전의 문장을 옮겨적었다는 역사를 들려주었지나는 아무것도 적지 않는 편을 택하겠어괜히 결연했었나 문득 안겼었나 그러나 나는 이제 먼 길을 돌아오늘의 흰 숲에 와서야 오래전의 편지를 쓴다자작나무의 꽃말은 당신을 기다립니다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문장들당신만 결..

詩다움 2025.01.15

굵은 비 내리고 [장만호]

굵은 비 내리고 장 만 호 굵은 비 내리고 나는 먼 곳을 생각하다가 내리는 비를 마음으로만 맞다가 칼국수 생각이 났지요 아시죠, 당신, 내 어설픈 솜씨를 감자와 호박은 너무 익어 무르고 칼국수는 덜 익어 단단하고 그래서 나는 더욱 오래 끓여야 했습니다 기억하나요, 당신 당신을 향해 마음 끓이던 날 우리가 서로 너무 익었거나 덜 익었던 그때 당신의 안에서 퍼져가던 내 마음 칼국수처럼 굵은 비, 내리고 나는 양푼 같은 방 안에서 조용히 퍼져갑니다 _《무서운 속도》(랜덤하우스, 2008)

詩다움 2024.07.18

당근밭 걷기[안희연]

당근밭 걷기 안 희 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모두 나의 땅이라 했다.이렇게 큰 땅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있다. 무엇을 심어볼까. 그게 뭐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 주황은 난색(暖色)이에요. 약동과 활력을 주는 색. 그는 머잖아 내가 당근을 수확하게 될 거라 했다. 나는 내가 바라온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잠시 휘청했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쏟아짐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근은 보고 있었네. 나의 눈빛. 번뜩이며 나를 가르고 간 것. 나의 당근들, 흙을 파고 두더지를 들였다. 눈을 가졌다. 자루를 나눠드릴게요. 원하는 만큼 담아 가셔도 좋아요. 혼자 먹기 아까운 당근들, 수확의 기쁨을 누리..

詩다움 2024.06.24

유월[이재무]

유월 이 재 무 ​ ​ ​ 그늘을 편애하는 달 우람한 그늘의 등이나 어깨에 기대 혹은 그늘을 홑이불로 끌어다 덮고 누워 생을 다녀간 이들에게 나는 슬픔이었을까 기쁨이었을까 과연 그늘이었을까 왜 항상 그들은 그이고 나는 나였을까 시서늘한 그늘 서너 바가지 푹 퍼서 등에 끼얹으며 이 생각 저 생각에 그늘 깊어지는, 한 해 가운데 정서의 키가 가장 웃자라는 달 ​ _《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실천문학사, 2014) ᆢ 뜨거운 여름의 시작, 6월. 그 무더위를 견디는 그늘같은 사람으로 화이팅입니다. 행복한 6월 되세요^^

詩다움 2024.06.01

내가 아는 그는 [류시화]

내가 아는 그는 류 시 화 내가 아는 그는 가슴에 멍 자국 같은 새 발자국 가득한 사람이어서 누구와 부딪혀도 저 혼자 피 흘리는 사람이어서 세상 속에 벽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 일생을 벽에 문을 낸 사람이어서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마시는 사람이어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 속의 별을 먹는 사람이어서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지평선 같은 사람이어서 그 지평선에 뜬 저녁 별 같은 사람이어서 때로 풀처럼 낮게 우는 사람이어서 고독이 저 높은 벼랑 위 눈개쑥부쟁이 닮은 사람이어서 어제로 내리는 성긴 눈발 같은 사람이어서 만 개의 기쁨과 만 개의 슬픔 다 내려놓아서 가벼워진 사람이어서 가벼워져서 환해진 사람이어서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이어서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죽어도 죽지 않는 노래 ..

詩다움 2024.05.23

초록의 어두운 부분 [조용미]

초록의 어두운 부분 조 용 미 빛이 나뭇잎에 닿을 때 나뭇잎의 뒷면은 밝아지는 걸까 앞면이 밝아지는 만큼 더 어두워지는 걸까 깊은 어둠으로 가기까지의 그 수많은 초록의 계단들에 나는 늘 매혹당했다 초록이 뭉쳐지고 풀어지고 서늘해지고 미지근해지고 타오르고 사그라들고 번지고 야위는, 길이 휘어지는 숲가에 긴 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우리는 거기 앉았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처럼 긴 의자 앞으로 초록의 거대한 상영관이 펼쳐졌다 초록의 음영과 농도는 첼로의 음계처럼 높아지고 다시 낮아졌다 녹색의 감정에는 왜 늘 검정이 섞여 있는 걸까 저 연둣빛 어둑함과 으스름한 초록 사이 여름이 계속되는 동안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다 노랑에서 검정까지 초록의 굴진을 돕는 열기와 습도로 숲은 팽창하고 긴 장..

詩다움 2024.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