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5061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성미정]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성 미 정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당신도 언젠가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

詩다움 2022.09.24

감식안에 대하여 [박용하]

감식안에 대하여 박 용 하 아이다호란 영화가 있지 그 영화에 -나는 길의 감식가야 평생 길을 맛볼 거야- 그런 기막힌 언어의, 독백의 길이 있지 길이 있는 영화는 끝없이 걸어가는 꿈이 있어 끝없이 산책하는 내부가 있는 한 당신에 관해 건방질 것도 없이 나는 최고의 감식가지 난 나무와 파도의 전문가야, 난 너 앞에서 담배를 태울 때 담배 맛이 가장 좋아, 난 너 앞에서 기후를 말할때 기분이 아주 훌륭해, 무엇을 맛본다는 것 그건 꿈을 씹는 거야 난 당신과 함께 술과 담배와 모래를 맛볼거야 다람쥐와 염소와 하늘과 민들레꽃을 맛볼 거야 여자와 어머니는 맨 마지막에 맛볼 거야 그러나 난, 히로뽕같은 생을 맛볼 거야 수류탄 같은 심장을 맛볼 거야 크레모아 같은 뇌를 맛볼 거야 무엇을 감식한다는 것 가령 그대를 사..

詩다움 2022.09.24

불투명한 영원[신철규]

불투명한 영원 신 철 규 손바닥을 종이에 대고 펜으로 손의 윤곽을 따라 그린다 손목 위쪽은 닫히지 않는다 바닥에 찍힌 십자가 그림자 우리는 수수께끼 앞에 서 있다 해변으로 밀려오는 손목들 불붙은 커튼 하늘은 주먹으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나무들은 게으르게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는 슬픔 물속에 손을 넣으려고 손을 잡기 위해 떠오르는 손이 하나 보인다 시계에 물이 찼다 기도가 끝났다 _《심장보다 높이》(창비, 2022) ᆢ 기도 앞에서만이라도 흔들리지 않기를, 오늘도 그 흔들리지 않는 슬픔을 배워가는 중이다. 더더욱 영원함은 바라지도 아니하며 그저 지상에 머무르는 시간이 하루라도 더 길었으면... 그 기도가 끝나지 않기를. (오늘도 기도하는, 초록여신)

詩다움 2022.09.20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김 수 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김 수 영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고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어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_《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창비, 1996) .. 취하고 싶은 날이 있다, 하지만, 취해지지 않는 날이다..

詩다움 2022.09.20

우리들의 아침 [여태천]

함께 차를 마셔요. 밤새 말아 둔 김밥을 먹으면서 백 년의 시간을 이야기해요. 머리 위로 바람이 부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챙이 넓은 모자를 고르죠. 아침에 꼭 어울리는 옷을 입고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어 두고 인사를 해요 이별의 행복은 언제나 우리의 것이 아니랍니다. 피크닉 가방에 가득 담긴 상자들 오후의 공원에서 먹는 초밥의 맛을 생각하고 교대로 거울을 봅니다. 어디선가 알람 시계가 울리고 우리는 반복해서 인사를 합니다. 이 아침에 어울리는 인사 당신의 기침 소리를 잠시 잊게 하는 커피 물 끓이는 소리 팔랑팔랑 날고 있는 아침의 생각으로 지구가 돌고 있습니다. 이별은 이별의 내일에게 맡기고 우리는 반복해서 인사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아침을 위해 커피 물을 끓이는 일 우리가 보내는 아..

詩다움 2022.09.20

이해 [하재연]

이해 하 재 연 당신의 표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당신의 밑에 서 있기로 합니다. 위가 깜깜합니다만, 위로부터 무엇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만, 신들의 이유 없는 장난처럼 내가 알 수 없었던 것은 또한 나의 아래 있었던 것 내가 밟고 서 있던 머리 누군가의 말하는 입과 깜깜함과 깜깜함 사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빗방울이 내 눈 속에 떨어지고 나서야 당신의 차가움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포춘쿠키의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형용사로 이루어진 결국 내 것이 아닌 점괘를 뽑는 오늘에서야. _《우주적 안녕》( 문지, 2019

詩다움 2022.09.17

미래가 쏟아진다면 [김소연]

미래가 쏟아진다면 김 소 연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이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아이가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아이가 되어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잠깐의 배웅이겠지..

詩다움 2022.09.14

날짜변경선 [신철규]

날짜변경선 신 철 규 구름 위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지상에 내리기 위해 비행기는 성층권으로 진입하고 불안정한 대기에 기체가 요동을 친다 동그란 유리창에는 빗방울이 맺히고 간간이 천둥번개가 친다 비행기는 검은 해협을 가로지르는 고래처럼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좌우로 뒤뚱거리면서 내가 비행기를 타기 전 당신에게 쏟아부은 악담을 다 용서해줄 수 있겠어? 할 수만 있다면 비행기 밖으로 발을 뻗어 달리고 싶었다 안전벨트를 풀 용기도 없이 승무원의 의연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무거워진 공기가 긴 침(針)이 되어 귓속을 찌른다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침을 삼킨다 언제쯤이면 나를, 내 삶을 덜 증오하게 될까 나이가 들수록 증오는 더 거세게 타오른다 증오의 정점에서 나는 나를 밀어버릴 수 있을까 장..

詩다움 2022.09.13

순간이 무성해진다 [이수명]

순간이 무성해진다 이 수 명 순간이 무성해진다. 순간을 뻗어보면 순간이 아프고 순간의 대립이 없어진다. 바닥에 떨어진 방은 도막이 났다. 도막이 없어진다. 도처에서 나는 관련을 결여하고 있다. 월요일이 가득해지면 월요일 대신 나는 본격화한다. 그것은 행위와 흡사하다. 약간의 얼굴로 나는 잠깐 어떤 평형 상태에 기여한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 평형은 무뚝뚝하다. 나는 미미하게 움직인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머리가 천천히 기울어 이쪽에서 저쪽까지 무성해지길 기다린다. 어떤 순간은 기둥의 형태로 목격된다. 나는 생각이 들어설 수 없는 기둥을 바란다. 마치 또 하나의 가능성처럼 실내와 실외가 일치되는 것이다. _《언제나 많은 비들》(문지, 2011)

詩다움 2022.09.13

인간의 조건 [신철규]

인간의 조건 신 철 규 멈춰버린 시곗바늘처럼 나는 서 있다 기침은 하지만 열은 없습니다 열은 있지만 기침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과 동선을 의심한다 내 곁에 다가오지 마세요 내 앞에서 입을 열지 마세요 눈도 깜빡거리지 마세요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것처럼 입속에서 진동하는 소리들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 나약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인간 이기적인 것을 감추려고 나약함을 과시하는 인간 신이 현미경으로 볼 때 인간은 지구라는 거대한 사탕에 붙은 먼지검불 같은 것 아무리 불어도 떨어지지 않는 광활한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격리 시설 같은 곳이겠지 한번 들어오면 다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우리는 조만간 망원경으로 눈앞에 있는 서로를 쳐다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손에는 투명비닐을 끼고 눈먼 사람처럼 서로의 얼굴을 더듬..

詩다움 202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