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며 [정호승]

초록여신 2022. 10. 17. 18:54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며
정 호 승







바지락칼국수 국물 위로 떠오른
조갯살을 날렵하게 집어먹는다고 해서
내가 붉은어깨도요새가 될 수 있겠는가
바지락 조개껍질에 아직 남아 있는
갯벌의 잔모래를 씹어먹었다고 해서
잔모래에 아직 남아 있는
파도소리에 고요히 귀기울였다고 해서
내가 가슴붉은도요새의 가슴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먼저 썰물이 되지 않고서는
내가 먼저 새들이 자유롭게 발자국을 찍어대는
맛있는 갯벌이 되지 않고서는
어떻게 머루처럼 까만 민물도요새의
눈동자에 걸린 수평선이 될 수 있겠는가
이제 돌아가실 날만 남은
틀니뿐인 늙은 아버지와
자장면보다 맛있는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며
식탁 위에 젓가락으로 수북이
조개껍질을 쌓아놓았다고 해서
어떻게 내가 거룩한 패총이 될 수 있겠는가




_《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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