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운주사(雲住寺)/시바타 산키치

초록여신 2023. 3. 6. 06:40


운주사(雲住寺)
시바타 산키치











붉게 익은 고추가 바람에 흔들리는
눈이 닿는 한 끝없이 펼쳐진 고추밭은
석양에 불타는 구름 같다
운주사로 오르는 오솔길을
바람에 이끌려
드문드문 비치는 사람 그림자와 함께 간다


천의 탑, 천의 돌부처가
이 들판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햇빛 아래, 부처의 등이 깨어지고
얼굴은 잘려서 떨어져 나가
풀숱에 잠들어 있다
9층이었던 석탑도 7층으로
하늘이 무너뜨린 것인가
사람이 무너뜨린 것인가


기단에 걸터앉아
광주에서 온 노인들이
차를 마시고 있다
"이것도 부처님, 저것도 부처님입니다"
사방에 흩어진 돌조각들을 가리키며
오래된 일본어를 기억해 내면서
가르쳐 준다


이것도 부처님?
밟고 왔던 풀 속에서
돌조각을 하나 줍는다
이제 상처는 치유되었을까
안으로부터 마멸된 돌은 뜻밖에 가볍다
일찍이 부처였고
지금도 부처인 돌


지혜가 반짝이는 이마였을까
미소를 띤 뺨이었을까
결인(結印)하고 앉은 손바닥
아니면 완만한 어깨에 걸친
가사(袈裟)였을까
아니, 하늘의 파편이
땅에 떨어진 것일까


부처를 품에 넣고
산을 내려오자
찻집의 여주인이
이 근처엔 식당이 없다며
배고픈 여행자에게
물 한 잔과 냉면을
대접해 주었다


아이들이
문턱에서 들여다보는 가운데
나는 새빨간 냉면을
혀가 얼얼하게 후루룩거리며 먹는다
고추 같은 전라남도의
여름을
돌부처의 피를



_《나를 조율한다》(문학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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