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논에 백일홍을 심다
장 옥 관
무논에다 나무를 심은 건 올봄의 일이다
벼가 자라야 할 논에 나무를 심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다
수백 년 도작(稻作)한 논에 나무를 심으면서도 아버지와 한마디 의논 없었던 건 분명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장남인 내게 일언반구 없이 여길 훌쩍 떠나지 않으셨던가
풀어헤친 제 가슴을 헤집던 아버지 손가락의 감촉을 새긴 논은 이제 사라지겠지만 남풍에 족보처럼 좍 펼쳐지던 물비린내 나는 초록의 페이지 덮고
올봄엔 두어 마지기 논에 백일홍을 심었다
백일홍 꽃이 피면
한여름 내내 붉은 그늘이 내 얼굴을 덮으리
백날의 불빛 꺼지고 어둠 찾아오면 사방 무논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
나는 북 카페를 낼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북 카페를 열 것이다
천 개의 바람이 졸음 참으며 흰 페이지를 넘기고 적막이 어깨로 문 밀고 들어와 좌정하면
고요는 이마 빛내며 노을빛으로 저물어 갈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활자 앞에 쌀가마니처럼 무겁게 앉아 아버지가 비워두고 간 여백을 채울 것이다.
무논에 나무를 심은 일이 옳은지 그른지부터
곰곰 따져 기록할 것이다
_《사람이 없었다고 한다》(문학동네, 2022)
ᆢ
고향집에 가면 텃밭의 한가운데 아버지가 심어놓은 블루베리 나무가 있다.
블루베리 열매가 달리고 나서야 그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블루베리 열매가 겨우 몇 개 달릴까 말까 하더니,
아버지가 떠나신 다음해 풍성하게 열매를 맺었다.
올해도 그럴 것만 같다.
블루베리 나무를 심을 당시에는
'우리 아버지도 참, 농작물을 심어야지, 왠 과일나무야 했었었는데'
ㅎㅎ
지금은 아버지를 추억하는 나무가 되고 있다.
무논에 초록의 페이지를 덮고 심어진 백일홍 나무.
그 나무는 잘 자라고 있을까?
아마도 그 붉은 빛은 백날동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계속 피어있을 것이다.
백일홍 꽃은 더 오래 반복되고 반복될 것만 같다.
천 개의 바람따라
시인이 심은 나무에 백일홍 꽃이 만발할 쯤 북카페를 방문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시를 큰 소리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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