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신철규
같은 숫자가 나란히 서 있다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사선으로 비친다
너의 왼뺨에 난 솜털이 하늘거리고
오른뺨은 그늘로 선명해진다
나는 조금 더 햇볕 쪽으로 다가앉는다
첫눈 오면 뭐 할 거야.
그것이 사랑의 속삭임인지 이별의 선언인지 헷갈려서 심장이 아래로 한 치쯤 내려앉는다
몸속의 저울추가 무거워진다
파동처럼 흐르던 마음이 입자가 되어 흩어진다
실내엔 아지랑이처럼 음악이 피어오른다
고요하던 실내에 음악이 켜지면 실내는 그만큼 무거워질까
소리에도 무게가 있을까
흘러간 시간들은 어디에 쌓이는 걸까
그거 알아? 열대지방에도 단풍이 든대. 건기 때 낙엽이 지는데 추위 때문이 아니라 공기가 건조해져서래.
나무는 몸 안에 깃든 물을 가두기 위해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낀 태양
나뭇가지들이 만든 가시 족쇄
버림받은 빛
컵을 놓친 손바닥의 새하얀 현기증
손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먼 미래에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거울 속에 들어 있는 환영을 손바닥으로 만져보듯이
거울 속으로 무섭게 달려드는 눈동자들
칼끝이 뾰족한 것은 무언가 찌를 것이 있기 때문이다
뭉툭한 마음은 찌를 곳도 없이 무너진다
너의 입술에 나비가 앉아 있다
잡으려고 손을 뻗자 사라지는
갈변한 마음들을 하나씩 털어낸다
나는 텅 빈 나무처럼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본다
털실로 만든 새는 노래하지 않는다
- 《심장보다 높이》 (창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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