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시인의 말/ 이성미

초록여신 2022. 10. 8. 05:50


사과에 대해 쓰기
이 성 미









9월의 첫날이 오면 과일에 대해 글을 써야지

맛있고 빨간 사과는 백설공주를 위해 남겨두고. 계모가 손대기 전의 사과에 대해.

사과가 익기 전에. 과즙이 흘러나오기 전에. 하얀 이빨이 사과에 박히기 전에. 사과에 대한 글을 끝내야지.

모든 사과 말고. 천천히 익어가는 느린 사과에 대해. 익기 전에 떨어져 뒹구는 사과에 대해.

더 맛있어지고 더 커지는 사과 말고. 높고 단일한 사과 말고. 가을의 기울어진 햇빛 아래에서.

사과가 되려 했지만. 사과가 되지 못한 사과의 경우에 대해 쓰고. 제목을 사과라고 붙여야지.

사과나무의 가느다란 가지에 대해 써야지. 나무를 받치는 파이프도. 파이프 옆 사과향기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사과를 매달고 있는 나무가 쓰러지기 전에.

모자를 쓴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오기 전에. 노래에 맞춰, 장갑 낀 손을 일제히 들어 올리기 전에.

사과에 대한 글을 쓰다가 그만두어야지. 사과가 사과가 아닌 것이 되기 전에. 쓰다가 거기서 멈춰야지.



_시인의 말,《다른 시간, 다른 배열》(문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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