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흰 숲 [이은규]

초록여신 2025. 1. 15. 05:25

흰 숲
     이 은 규

 

 

 

 

나무의 이름 안쪽에는
자작자작 모닥불 소리가 잠들어 있고

 

오래전 북방의 시인은
온통 자작나무다, 라는 문장을 썼다
행간 사이로 눈발이 내리면
세상이 금세 흰 종이로 변할 것만 같은데

 

추운 바람으로부터 부름켜를 지키기 위해
나무는 종이처럼 얇은 껍질을 겹겹이 두르고 있다
마음만은 얼지 않도록 부둥켜안았던 우리처럼
두꺼운 외투보다 모닥불보다, 포옹

 

가만가만 눈내리는 동안
세상은 온통 내재율로 가득하다
언젠가 당신은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경전의 문장을 옮겨적었다는 역사를 들려주었지
나는 아무것도 적지 않는 편을 택하겠어
괜히 결연했었나 문득 안겼었나

 

그러나 나는 이제 먼 길을 돌아
오늘의 흰 숲에 와서야 오래전의 편지를 쓴다
자작나무의 꽃말은 당신을 기다립니다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문장들
당신만 결석한 우리들의 겨울 소풍
온통 내재율로 가득하고 세상은
눈 내리는 동안 가만가만

 

나무둥치에 귀 기울이면
기다리다 그만 돌아갑니다
나이테 너머 한 사람의 문장이 도착할까
우리들의 겨울 소풍
당신만 결석한

 

고요한 안부가 붐비는 흰 숲 사이
포옹의 습관을 잃고 서 있는 우두커니, 한 점

 

 _《무해한 복숭아》(아침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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