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피아노는 황소다 [양진건]

초록여신 2008. 8. 15. 11:51

 

 

 

 

 

 

 

 

 

그것은 황소다.

한 시간의 연습을 두고

당신은 소 한 마리 잡는 거라 했다.

오늘은 다섯 시간 정도 붙들어 앉았으니

대여섯 마리쯤 너끈한 셈인가?

사실 난, 건반 두드리는 게

그렇게 힘 부치는 일인 줄 몰랐다.

그것을 다루는 그대의 몸짓이

순하게 보였기에

그런데다 내는 소리도 고운 것이

그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감히 소를 잡는 줄 짐작할 겨를이 없었다.

그 말을 듣고 새삼 주의 기울여보니

과연 그것은

등판이 딱 벌어진 검은 황소다.

흰 이를 드러낸 채 씩씩대는 거대한 황소.

당신은 이제 막

아, 살며시 눈 감은 채

그 놈의 정수리를 향해 칼을 세우고 있다.

 

 

 

 

 

* 귀한 매혹, 문학과지성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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