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구름이라도 그려 넣자 [심언주]

초록여신 2008. 5. 17. 19:45

 

 

 

 

 

 

 

 

 

의사가 복부에 감지기를 올려놓았다

태동이 멈춘 모니터

눈물 나는

파란 하늘에

사납게 흔들리는 상수리나무

떨어져 내린다

 

 

헐거워진 숲

허리 슬며시 껴안는 바람아

텅 빈 모니터에다

어리고 통통한

구름이나 몇 장 그려 넣자

 

 

 

 

* 4월아 미안하다, 민음사.

 

 

 

......

 이 시에서도 수직적 이미지가 강렬하다. 지표에 머물러 있던 그림자 주체가 상수리나무 위로 올라가 있다. 임신이란 들어 올려지는 것일까. 여성에게(남성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수태는 우주적 사건이다. 가장 치열하게 우주에 참여하는 것이다. 상수리나무(우주의 나무일 수도 있다.)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무 꼭대기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내 아이"가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져 내린"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실제의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니터"를 보고 있다. 이 모니터에 「하느님의 아이를 배지 않겠다구요」의 "유리창"이 오버랩되는 까닭은 왜일까. 인간인 '나'와 하늘(하느님) 사이에 인간이 만든 것들이 강력하게 개입되어 있다. 유리창은 하늘과 나를 가로막고, 모니터는 아예 하늘 혹은 자궁을 대체한다. 아이를 잃은 화자는 "어리고 통통한 구름" 몇 장을 모니터에 그려 넣으면서 슬픔을 다스린다. 가장 비극적인 '수태고지(受胎告知)'가 아닐까. 그리하여 수태와 생산을 주관하는 주인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라는 인식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이쯤에서 그림자 주체� 그림자를 벗어 버리고, 절대자와 마주하는 당당한 주체로 거듭난다.

ㅡ 이문재(시인), 작품 해설 [그림자, 벌떡 일어서다] 중에서 발췌.

 

 

전에 친구가 펑펑펑 울면서 이름이 불리어지기 전의 아이를 슬퍼했었다.

여자라면 그 신비로움에 울고

그 모성애는 지진 속에서도 솟아날 구멍을 찾을 수 있으리라.

숱한 부모들이 자의든 타의든 부재의 아이를 떠나보낸 경험을 가지고 살아갈 것 같다.

어리고 통통한 구름 몇 장 그려 넣자는 말...

슬픈 구름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구름 몇 장으로 슬픔을 잠재울 수 있을까?

시는 해설과 곁들어 읽을 때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초록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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