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좋은생각, 2008. 6월호.
밥 [전동균]
6.25동란 중 아버지가 납북된
경상도 상주 땅 어느 집에서는
아침저녁 끼때가 되면 꼭
밥상 위에 아버지의 밥그릇을 올려두었다는데
아이들이 방문을 활짝 열고
" 아부지 진지 드시이소"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하는데*
갓 젖을 뗀 막내부터
수염 거뭇거뭇한 큰아이까지
때로는 울먹이며 한마음으로 입을 모아
생사 불명의 아버지를 밥상에 모신 뒤에야
차례차례 얼굴이 비치는
희멀건 죽사발에 숟가락을 꽂았다고 하는데
시가 본디
만물을 제자리에 모시는 간절한 그리움의 말씀이라면
조석(朝夕)으로 밥상 위에 놓이던
주인 없는 밥그릇 하나,
천지사방에 종적 없는 아버지를 찾아 부르던
그 막막하고 애절한 목소리야말로
시 아니겠는가
시가 영원히 먹고살아야 할 밥이 아니겠는가
=======================================
* 박두연 여사의 수필[아버지의 제사상]에서
* 거룩한 허기 / 랜덤하우스, 2008. 2. 25.
밥 알[이재무]
갓 지어낼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 몸에 피는 꽃, 1996.
정끝별 [밥이 쓰다 ]
파나마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버린 선배의 안
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
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 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피어라, 석유!
밥에 대하여 [이성복]
1
어느날 밥이 내게 말하길
<<참, 아저씨나 나나......
말꼬리를 흐리며 밥이 말하길
<<중요한 것은 사과 껍질
찢어 버린 편지
욕설과 하품,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氷壁을 오르기 전에
밥 먹어 두는 일.
밥아, 언제 너도 배고픈 적 있었니?
2
밥으로 떡을 만든다
밥으로 술을 만든다
밥으로 과자를 만든다
밥으로 사랑을 만든다 愛人은 못 만든다
밥으로 힘을 쓴다 힘 쓰고 나면 피로하다
밥으로 피로를 만들고 悲觀主義와 아카데미즘을 만든다
밥으로 天國과 유관과 꿈과 화장실을 만든다 피로하다 피로하다 심히 피로하다
밥으로 苦痛을 만든다 밥으로 詩를 만든다 밥으로 철새의 날개를 만든다 밥으로 오르가즘에 오른다 밥으로 양심가책에 젖는다 밥으로 푸념과 하품을 만든다 세상은 나쁜 꿈 나쁜 꿈 나쁜 밥은 나를 먹고 몹쓸 時代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정과 눈물과 能辯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希望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밥이 法이기 때문이다 밥은 國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찬밥 [문정희]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1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우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