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 음지에서 왔다.
다섯 살,
어느 방 할 것 없이 어둠이었다
일곱 살,
집의 반쪽은 양지, 반쪽은 음지였다
아파트는 그랬다
크고 넓은 안방은 세대주 '갑'과 배우자 '을'의 차지였고
볕이 잘 드는 마루는 쓸모가 없었다
부엌과 작은 방은 음지였다
물론 '정'은 음지였다
여덟 살, 아홉 살, 열 살,
내내 음지였다
열한 살, 열두 살, 열세 살,
역시 음지였다
음지에서 자란 곰팡이가 가끔 포자를 터뜨렸다
음습한 구애
열네 살,
'정'의 방에서 멋진 노을을 볼 수 있었다
동향집의 비극
열다섯 살, 열여섯 살, 열일곱 살
노을 속에서 가끔 소쩍새가 울었다
열여덟 살,
가끔 노을에 밧줄을 걸고 줄타기를 했다
그러다가 그 줄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했다
목을 매달지는 않았다
열아홉 살,
난생처음 하루 종일 빛이 드는 방에 살았다
노란 물탱크를 머리에 인 옥탑방
노을 대신 스모그 속을 헤맸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찜통터위에 해가 뜨면 기어나와야 했다
양지의 설움
스물세 살
'갑'의 퇴직금으로 또 다른 '갑'에게 보증금 3천에 월 30짜리 양지를 구했다
보증금을 낸 '정'은 공평하게 가장 크고 밝은 방을 차지했다
두 명의 음지가 '정'에게 기생했다
스물네 살,
눈을 뜨면 해가 졌다
양지의 뿌듯함은 '정'의 것이 아니었다
스물다섯 살
임대인 '갑'은 임차인 '정'에게 불법 기생하는 두 명의 어둠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다
빛이 생기라 하니 빛이 생기고
나가라 하니 나갔다
스물일곱 살,
오전 내내, 손바닥만큼 비치는 해를 따라 몸을 돌렸다
주몽을 잉태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대신 평생 양지에서 자라서 양기충천한 '갑'이 나타났다
스물여덟 살,
'정'은 세대주 '갑'의 배우자가 되었다
'정', '을'로 승격
스물아홉 살,
집을 나서면 해가 뜨고, 집에 들어오면 달이 떴다
빈집에서도 양지는 혼자 따뜻했다
서른 살,
'갑'과 '을'의 직계비속이 태어났다
그를 '정'이라 이름 붙였다
'정'은 음지에서 왔다
* 해바라기 연대기, 랜덤하우스.
.......
우리의 과거인 그녀와 그녀의 미래인 우리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갑도, 을도, 병도 아닌, 중심에서 조금은 멀리 있는 '정', '정'이 누군가의 배우자로서 '을'이 되어 낳은 그/녀 역시 '정'의 운명을 따른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특별해 보이지만 멀리서 지켜보면 그저 평범할 뿐인 인생의 궤적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할당된 시간의 틀인 것이다. 특히나 양지보다는 음지에 가까운 모든 소수의 존재들에게는 하찮은 운명이 놀랍도록 반복적으로 배당된다.
이런 자들의 삶은 불가능에 가깝고, 자신의 몸을 끌고 하루하루를 지탱한다는 것 자체가 순간순간을 억지로 접붙이는 일과 다르지 않다.
ㅡ 허윤진(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환한 불면] 중에서, 발췌.
윤예영의 시는 낭만주의적 서정시처럼 매끄럽게 우리의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고 그녀 자신의 고백처럼 '유리병 조각을 씹는 듯한' 불편한 서적거림을 남기는 반미학의 시다. 그녀의 시는 무엇에 대해 말하더라도 말하는 방법을 전경화시켜 보여준다. 그것이 그녀의 현대성이다. '일관된 말하기'를 거부하며 지적 균열과 아이러니를 통해 변이, 산포, 접속되어 나간다는 점에서 수목형의 언어가 아니고 선들로 이어지는 다질적인 요소들의 결합 공간 ㅡ 리좀(rhizome)의 언어다. 아버지 돈키호테와 엄마 둘시네아의 딸, 로시난테의 동생인 그녀에게 체험은 말하기의 시작일 뿐 곧 의미의 탈구를 따라 언어는 진행되고 부서진 징후들은 모순의 장소에서 환상적으로 혼합된다. 어딘지 뼈들이 서걱거리고 건조한 상상력이 어긋나고 있는 윤예영 텍스트의 미묘한 매력!
ㅡ 김승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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