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POEM

얼굴 [김혜순]

초록여신 2005. 9. 17. 12:21

 

당신 속에는 또 하나의 당신이 들어 있습니다

 

당신 속의 당신은 당신의 몸을 안으로 단단히 당겨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손톱은 안쪽으로 동그랗

게 말려들고, 당신의 귓바퀴 또한 당신의 몸속으로 소

용돌이치며 빨려들고 있습니다 당신 속의 당신이 당신

을 당겨 잡은 그 손을 놓는 순간 당신은 아마 이 세상

에 없을 겁니다

 

당신의 얼굴은 당신 속의 당신이 당신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모습 그래로 굳어져 있습니다 가끔 그 얼

굴이 당신 밖의 내 얼굴로 기울어지기도 하고, 당신의

두 눈동자 속에서 나를 내다보는 당신 속의 당신을 내

가 느끼기도 하지만 당신 속의 당신이 당신을 당겨 잡

은 그 손을 놓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팽팽히 당겨져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그 긴장을 견

디느라 이제 주름이 깊습니다

 

당신 속의 당신은 또 얼마나 힘이 센지 내 속의 내

가 당신 속으로 끌려 들어갈 지경입니다

 

당신은 지금 붉은 포도주를 한 잔 마시고 치즈를 손

에 들었습니다

 

내 속의 나는, 치즈는 우유로 만들어졌다는 걸 상기

합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 우유는 어느 암소 속의

암소가 내뿜은 걸까 고민합니다

 

혹 당신이 멀리 떠나 있어도 당신 속의 당신은 여기

에 또 있습니다 나는 당신 속의 당신을 돌려보내지도,

피하지도 못합니다

 

아마 나는 부재자의 인질인가 봅니다

 

내 속의 내가 단단히 나를 당겨 잡고 있는 동안 나

또한 살아 있을 테지만 심지어 나는 매일 아침 내 속

의 나로 만든 치즈를 당신의 식탁 위에 봉헌하고 싶어

집니다

 

 

 

 

 

 

 

 

 

 

- 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288) 중에서

 

 

 

 

 

 

 

 

 

* 쨍한 사랑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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