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파라솔
김 상 미
진짜 여자가 되려면 파라솔이 필요할 거야
파라솔은 햇빛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반쯤은 여자들을 눈부신 회상의 멜로디로 만들어주지
나보다 더 먼저 순결을 잃은 언니들이
대성당의 그림자처럼 매혹적인 손길로
내게 건네준 푸른 파라솔
나는 그 서늘하고 완곡한 색채에 취해
그만 통금을 놓쳐버리고
새벽녘 광복동 거리에서 하염없이 다가올
불볕더위를 기다렸다
파라솔이 펴지고 접힐 때마다
끈적이는 눈물 같은 불볕더위에 내 어깨끈은 자주,
은밀히 흘러내리고
그때마다 나는 능숙한 용접공이 되어 언니들의 욕망을
보호받지 못한 내 욕망에 아주 잘 용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그늘들을 친한 벗으로 끌어들였던가
나보다 더 먼저 여자가 된 언니들이
가슴 절절하고 애잔한 맨발로 아슬아슬
삶이라 불리는 그 수수께끼 강을 건너다니며
두 손에 쥔 짧은 행복을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파라솔처럼 활짝 펼쳐 보일 때마다
나는 푸른 파라솔을 쓰고 하염없이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던
모네의 그림 속 한 여인을 생각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사라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던
내 언니들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하고 내 엄마들 같기도 한
그 뜨겁고 황홀한 그녀들의 피냄새!
너무나도 신비하고 놀라운 그 회상의 멜로디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문학동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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