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푸른 파라솔 [김상미]

초록여신 2017. 11. 7. 07:50


푸른 파라솔

 김 상 미







진짜 여자가 되려면 파라솔이 필요할 거야

파라솔은 햇빛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반쯤은 여자들을 눈부신 회상의 멜로디로 만들어주지



나보다 더 먼저 순결을 잃은 언니들이

대성당의 그림자처럼 매혹적인 손길로

내게 건네준 푸른 파라솔



나는 그 서늘하고 완곡한 색채에 취해

그만 통금을 놓쳐버리고

새벽녘 광복동 거리에서 하염없이 다가올

불볕더위를 기다렸다



파라솔이 펴지고 접힐 때마다

끈적이는 눈물 같은 불볕더위에 내 어깨끈은 자주,

은밀히 흘러내리고



그때마다 나는 능숙한 용접공이 되어 언니들의 욕망을

보호받지 못한 내 욕망에 아주 잘 용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그늘들을 친한 벗으로 끌어들였던가



나보다 더 먼저 여자가 된 언니들이

가슴 절절하고 애잔한 맨발로 아슬아슬

삶이라 불리는 그 수수께끼 강을 건너다니며

두 손에 쥔 짧은 행복을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파라솔처럼 활짝 펼쳐 보일 때마다



나는 푸른 파라솔을 쓰고 하염없이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던

모네의 그림 속 한 여인을 생각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사라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던

내 언니들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하고 내 엄마들 같기도 한

그 뜨겁고 황홀한 그녀들의 피냄새!



너무나도 신비하고 놀라운 그 회상의 멜로디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문학동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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