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지구 서랍 [이병률]

초록여신 2017. 11. 6. 09:51


지구 서랍

 이 병 률









터미널에서 스친 한 노인이

한 손에는 약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전화기를 들고

마음이 아파서인지 몸을 반쯤 접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순수하게 했는데,

나한테 이러믄 안 되지



나는 마음의 2층에다 그 소리를 들인다

어제도 그제도 그런 소리들을 모아 놓느라

나의 2층은 무겁다



내 옆을 흘러가는 사람의 귀한 말들을 모으되

마음의 1층에 흘러들지 않게 하는 일



그 마음의 1층과 2층을 합쳐

나 어떻게든 사람이 되려는 건

사람의 집을 지으려는 것



나의 마련은 그렇다



한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것은

한 사람이 깊숙이 칼에 찔리는 것은

지구가 상처받는 것

지구의 뼈가 발리고 마는 것



지구 뿌리에 빗물 전해지듯

당신들이 이 지구에 귀함을 보탤 거라면



나의 완성은 그렇다

지구 사람 가운데 나에게 연(緣)이 하나 있다면

당신들의 흩어짐을 막는 것

지금은 다만 내 마음의 1층과 2층을 더디게 터서

언제쯤 나는 귀한 사람이 되려는지 지켜보자는 것



나의 궁리는 그렇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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