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십년 후의 나에게 나 희 덕 십년 후의 나에게, 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그보다 조금 일찍 내게 닿았다
책갈피 같은 나날 속에서 떠올라 오늘이라는 해변에 다다른 유리병 편지 오래도록 잊고 있었지만 줄곧 이곳을 향해 온 편지
다행히도 유리병은 깨어지지 않았고 그 속엔 스물다섯의 내가 밀봉되어 있었다 스물다섯살의 여자가 서른다섯살의 여자에게 건네는 말 그때의 나는 첫아이를 가진 두려움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한마리 짐승이 된 것 같아요, 라고 또하나의 목숨을 제 몸에 기를 때만이 비로소 짐승이 될 수 있는 여자들의 행복과 불행,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 자란 만큼 내 속의 여자들도 자라나
나는 오늘 또 한통의 긴 편지를 쓴다 다시, 십년 후의 나에게 내 몸에 깃들여 사는 소녀와 처녀와 아줌마와 노파에게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그 늑대여인에게 두려움이라는 말 대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책갈피 같은 나날 속으로, 다시 심연 속으로 던져지는 유리병 편지 누구에게 가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줄곧 어딘가를 향해 있는 이 길고 긴 편지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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