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기도
ㅡ유랑
눈물이 자꾸 쏟아진다. 나쁘지 않다. 이 슬픔에는 아무 내용도 없다. 다만 나를 내 몸에 잘 묶어둘 뿐. 한때 나의 무기였던 분노는 이제 고요하다. 세상 밖에서 오래 헤맨 자는 헤매임 안에 집 짓는 법을 배운다. 나는 유랑 속에 정착한다.
이제 말들을 잘 만지게 되었다. 맨손바닥에 가시가 오래 박혔었다. 세상의 말들, 숱한, 미움과 불신의 말들, 그러나 이따금 깊은 사랑의 말들, 나는 맨손으로 그 얼굴들을 만진다. 얼굴들을 보기 전에 벌써 내 손바닥에 들어와 박히는 말들.
쓸쓸함은 이미 오래전에 증발되었다. 족장들을 거느린 순례하는 어린 왕들이 그 땅에 불을 질렀었다. 나는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배신의 시간들이 무력해졌다. 지평선에 남은 불의 기운이 미안했다. 어린 왕들은 무지하고 순결하게 운명의 길을 따라갔다.
눈물이 자꾸 쏟아진다. 나쁘지 않다. 이 슬픔에는 아무 내용도 없다. 다만 내 몸을 내 몸에 잘 묶어둘 뿐. 한때 숲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가게 했던 이 흰 진주들은, 지금은 지하의 물길을 따라 흘러가 버렸다.
나는 아무것도 거두지 않는다. 깊은 절망이 구원의 길을 열었다는 것을 나는 어린 왕들을 따라가 보고 비로소 깨달았다. 족장들은 지금도 불길 속에서 타오른다. 나는 이제 울지 않는다. 낸 눈으로 쏟아지는 것은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어린 왕들이 불태우고 있는 족장들의 혼이다.
나는 유랑 속에 정착한다.
*꽃의 신비(시로 여는 세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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