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먹구름을 위한 [김충규]

초록여신 2013. 9. 13. 11:06

 

먹구름을 위한

 김 충 규

 

 

 

 

 

 

 

 

세탁을 해도 깨끗해지지 않을 먹구름이 평야를 이루고 있다

새의 몸을 가진 듯한 까만 점 두 개가 먹구름을 비켜간다

일각수처럼 선 채 풍경이 점점 사납게 어두워지는 것을 본다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있다 지금이 그런 때

하프를 연주하는 처녀의 목덜미에 이빨을 깊이 박아넣는

흡혈귀의 형상으로 먹구름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다

피를 빨린 처녀가 흡혈귀를 몹시 숭배할 수 있듯

나는 저 먹구름을 숭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 피는 지극히 어둡고 나는 무엇엔가 흡입되고 싶다

지금 내게 아비가 누구냐고 물으면 저 먹구름이라 말할 수 있다

질서 없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영토이므로 먹구름은

몽롱한 동경이다 불안하므로 더 애틋한 불륜이다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먹구름을 위한 것이다 나는 태양을 숭배하는 자들로 우글거리는

이 지상에서 먹구름을 숭배하기로 한 자

신앙이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먹구름을 내 혈관 가득 채우고 싶은 자

하프를 배워 먹구름을 위한 연주를 하고 싶은 자

먹구름이 비를 내리지 않아도 나는 이미 흥건히 젖어 있다

 

 

 

*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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