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펜
유 종 인
홈플러스 마트 옆 당단풍(唐丹風) 가로수 아래서
검정 사인펜 하날 주웠다
토요일 저녁
길 건너 마사회 소속 TV 경마가 열린 건물에서
중년 남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사인펜은 아직 멀쩡하다
멀쩡한 사인펜인데
다 쓴 것처럼
어딘가 쓸쓸해
나는 이걸로 변두리의 시를 써볼까
선두(先頭)의 말 한 쌍을 낙점하는 데 썼으나
모두 뒤처졌을, 과오의 펜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순애보를 써볼까
사연이 기구하면 소설이 될까
말을 놓치고 뒤처진 말을 버리고
저녁 어둠에 어둠이 되어가는 등짝들,
말을 놓친 사람들의 절필(絶筆)을 주워
필름 끊긴 간밤의 기억을
늡늡한 사랑의 야사(野史)를 써볼까
* 사랑이라는 재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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