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복사꽃 아래 천년 외 5편 [배한봉] ㅡ2011 제2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작

초록여신 2011. 12. 28. 20:33

복사꽃 아래 천년 외 5편

 배 한 봉

 

 

복사꽃 아래 천년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가 걸어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홍시를 딴다

 

 감나무 꼭대기 홍시

 장대 들이밀자 바알갛게 익은 홍시 하나 그만 덤불 언덕에 떨어진다

 홍시의 추락은 세상을 버림으로써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일

 떨어져 안착한 홍시는 누렇게 마른 덤불이 붉고 큰 새알 하나 받쳐든 것 같다

 그럼으로써 덤불은 새로운 세계의 한 풍경으로 아름다워진다

 밤새도록 내 영혼의 골짜기에서 울던 새들이 필생의 힘을 다해 낳아놓은

 울음 덩어리도 붉고 큰 새알 되고 싶을 것이다

 태양과 달이 수백 번도 더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만들었을 알

 바람과 구름의 말이 줄啐 소리와 탁 소리로 스며들어 있을 알이 되고 싶을 것이다

 다시 장대를 들이밀자

 어깨가 아프다

 내 안에 달린 둥글고 붉은 어떤 것을 떨어뜨리려고 중력이 힘껏 내 어깻죽지를 잡아당기는 모양이다

 가지 축 늘어진 감나무들

 저들도 오십견을 앓는 것일까

 뼈 마디마디에서 바람 꺾어지는 소리 들린다

 나는 홍시를 놓친 것이 아니다

 손돌바람이 점령한 늦가을 하늘의 숨은 온기를 지상에 데려온 것이다

 덤불 언덕을 우주의 붉은 중심으로 만든 저기 저 천의무봉의 알 하나

 누추하고 쓸쓸해서 아픈 한 세상이 환해진다

 새 세계를 얻으려면 제일 먼저 가지고 있던 세계를 놓아야 한다

 

 

 

수련을 위하여


 주남저수지, 새가 날아오르는 길에는 새벽과 아침 사이의 여운이 있다


 수련 꽃봉오리들이 옹알이하며 보드랍게 빨아먹는 뿌우연 젖, 자꾸 감추고 싶어하는 물안개의 부끄러움이 있다, 그 사이에서

 차츰 저수지를 더 웅숭깊게 하는, 촉촉하게 젖은 아침의 마알간 눈


 그 눈빛이 너를 불러온다

 아직도 마음 한쪽 끝이 붙잡고 있는, 공복의, 파릇한 허기같은 그리움


 일제히 물안개 지우며 선명하게 펼쳐지는 저수지 풍경같이

 햇살 속에 놓여져 이제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마음이 투두둑, 터지는 실밥 같은, 수련 꽃봉오리를 열려는지 다문 입 자꾸 움찔거린다


 새 떼를 떠메고 날아올랐던 저수지가 시퍼렇게, 드높은 하늘이 되는 순간이다

 

 

 

눈물



 눈물은 송곳보다 힘차게 살가죽을 뚫는다. 흐느낌 없어도 끓는 몸의 순간을 생각보다 먼저 간파하고 용암처럼 솟는다. 강철 사나이도 그 힘을 막지 못한다.


 꺼내야 하는 순간 눈물을 꺼내지 못한다면 몸은 스스로 살가죽을 풍선처럼 터트리고 말 것이다. 영혼의 별은 빛을 잃고 새는 찢긴 북처럼 노래하지 못할 것이다. 눈 속의 어둠을 눈물만큼 잘 닦아낼 수 있는 것은 세계 어디에도 없으므로 눈물은 육체의 물질이 아니라 심연의 반영이다.


 얼음의 시간, 암흑의 지하 동굴에 갇혀본 자는 알 것이다. 박쥐처럼 찍찍거리는 슬픔을 저으면 차갑고 캄캄한 시간이 새어나오는 것을. 그 공포가 숨어 있는 지하 동굴, 퇴로를 막아놓은 빙벽은 우리 속에 있다. 결빙을 뚫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격렬한 눈물뿐이다.


 칼의 맹세는 피 냄새를 가지지만, 태양을 보며 눈물로 이름을 새긴 맹세는 피를 정화시킨다. 70% 수분 가운데 1%도 안되는 눈물이 짜고 뜨거운 이유도 거기 있다. 눈물은 힘이 세다.

 

 

 

누 떼가 강 건너듯


 문장이라는 짐승을 잡으려고 놓아둔 덫이 녹슬어 있다. 녹슨 덫을 풀들이 휘감고 있다. 달래라도 몇 뿌리 건질까 싶어 호미 꺼내는데


 깜깜하다.


 깜깜해서 술 먹고, 술 먹고 눈뜬 지 사흘. 돈도 못 벌고, 밥만 축내는 이 축생, 누가 좀 안 잡아가나, 홧김에 쾅 방문을 닫고 나서는데 휘청,

 현기증이 발목을 휘감는다. 거울을 보니 침묵이 눈동자를 걸어잠근다.


 책장에는 문장이라는 짐승의 싱싱한 콧김 대신 박동 없는 그녀의 심장이 고요히 말라가고 있다.


 하느님. 멧돼지 같은 이 슬픔 좀 삭아서 올해엔 과수원에 뿌릴 거름이나 되었으면 좋겠군요. 마음이


 먹장구름이다. 우박 폭우를 동반한 폭풍


 덩어리, 덩어리째 마음 캄캄한 축생아.


 문장이라는 짐승이 시커멓게, 떼로, 누 떼가 강 건너듯 삶을 건너고 있다.

 

 

얼음이 산벚나무 발목을 꽉


 비음산 용추계곡 소沼가 허연 얼음으로, 늙은 산벚나무 발목을 꽉 붙잡고 있다


 연분홍 봄날을 계류로 흘려보내기만 했던 소가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고 겨울부터 미리 산벚나무를 온 힘으로 꽉 붙잡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제 더는 용서 못한다고 이웃 영진이 할매가 바람난 영감님 허리춤을 꽉 붙잡고 있는 것이다


 수태가 저승꽃같이 말라붙은 산벚나무

 그래도 역정 한번 내지 않는다, 뼛속 바람 소리가 거칠게 꺾어져도 삐쩍 마른 팔로 시린 하늘이나 휘휘 젓는


 산벚나무

 그 발목 붙잡고 입 꽉 다문 용추계곡


 그러니까 소沼의 허연 얼음은 아무리 추워도 우리 오래오래 사랑하자는 굳센 맹세인 것이다

 

 

 * 2011 제26회 소월문학상 대상 수상작 중에서

 

배한봉 시인의 대상 수상작품은 '복사꽃 아래 천년'을 포함하여 15편입니다.

나머지 작품도 감상하시려면 첨부화일을 참조하세요.

첨부파일 복사꽃 아래 천년외 14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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