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정말, 잎 다 날린 연한 가지들
주인 없는 감나무에 등불 만 개 밝히고
대낮부터 취해서 빈 하늘로 피어오르는
화가 마티스의 감빛 누드, 선정의 살결이
그 옆에서 얼뜬 미소로 진언을 외우는
관촉사 은진미륵, 많이 늙으신 형님.
야 정말, 잠시 은근히 만져보기도 전에
다리 힘 다 빠져 곱게 눕는 작은 꽃,
꽃잎과 씨도 못 가린 채 날아가버리지만
죽은 풀, 시든 꽃가지, 잡초 씨까지 모두 모아
뜨거운 다비(茶毘)에 부처 사리나 찾아보고
연기 냄새 가볍게 품고 꽃을 떠날밖에.
저 산에 흥청이는 짙은 단풍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일상은 너무 단순하다.
산 너머 저 쪽빛 바다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쪽배는 너무나 작다.
그러니 살아온 평생은 운명일밖에.
눈을 뜬 육신의 마주침도 팔자일밖에.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가늠되지 않는
야 정말, 아득한 것만 살아남는 이 가을,
어렵게 살아온 천지간의 이 가을.
*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문학과지성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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