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나큰 잠 [정끝별]
한 자리 본 것처럼
깜빡 한 여기를 놓으며
신호등에 선 목이 꽃대궁처럼 꺾일 때
사르르 눈꺼풀이 읽던 행간을 다시 읽을 때
봄을 놓고 가을을 놓고 저녁마저 놓은 채
갓 구운 빵의 벼랑으로 뛰어들곤 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사과 냄새 따스한
소파의 속살 혹은 호밀빵의 향기
출구처럼 다른 계절과 다른 바람과 노래
매일 아침 길에서 길을 들어설 때
매일 저녁 사랑에서 사랑을 떠나보낼 때
하품도 없이 썰물 지듯
깜빡깜빡 빠져나가는 늘 오늘
깜빡 한 소식처럼
한 지금을 깜빡 놓을 때마다
한 입씩 베어먹는 저 큰 잠을 향해
얼마나 자주 둥근 입술을 벌리고만 싶은가
벼락 치듯 덮치는 잠이 삶을 살게 하나니
부드러워라 두 입술이 불고 있는 아침의 기적
영혼의 발끝까지 들어올리는 달콤한 숨결
내겐 늘 한 밤이 있으니
한 밤에는 저리 푹신한 늘 오늘이 있으니
삼매三昧 [정끝별]
직박구리가 목련꽃에 머리를 쑥 박고
이 뭐꼬! 꽁지를 한껏 치켜세운 채
검은 직박구리가 흰 목련꽃잎을
용맹정진 긴 부리로 촉 촉
장좌불와長坐不臥! 가지에 힘껏 발톱을 박고
금세 한 목련 다 지고
목련 가지 끝 입눈 하나가
하늘 경經 한 장을 바짝 끌어당기자
푸른 두 귀가 쫑긋,
벌어진 봄의 입이란 무릇
세 그루 건너
배꼽마당처럼 허벅진 배꽃더미는
직박구리 봄의 무아無我다
설렁탕과 로맨스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 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시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시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 앉아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 앉아 한 번 더 마주 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하루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읽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 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 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 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 번도 한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 번 다시는 보지 못할 한 평생과
단 한 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 평생이
추적처럼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네와 설렁탕집에
꽃이 피는 시간 [정끝별]
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
잊거나 뒤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 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꿔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꼬르륵 제 딴의 한소끔 밥꽃을
백기처럼 들어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 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 마저 갈 수 있겠다
까마득한 날에 [정끝별]
밥 하면 말문이 막히는
밥 하면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
밥 하면 순간 숨이 뚝 끊기는
밥들의 일촉즉발
밥들의 묵묵부답
아, 하고 벌린 입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반쯤 담긴 밥사발의
저 무궁, 뜨겁다!
밥
* 제 23회 2008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대상 수상작 중에서), 문학사상, 2008.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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