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 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 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채
세상에다 제 목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감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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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이 여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발굴된 유물이다. 여자의 몸 자체가 유물이 된다는 것은 복합적이다. 이 여자 몸ㅡ미라에 하나의 개인 서사가 덧붙여진다. 이 서사는 남자를 영원히 기다리는 여자라는 전형적인 여성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이 여자의 신화를 보존하기 위해 그녀의 몸을 열어 미라로 만든다. 사람들이 그녀의 몸을 미라로 만들기 위해 가한 신체적 훼손은, 여성 육체의 가해지는 상징적인 폭력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다시 유리관 속에 뉘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온다. 그녀의 육체는 이런 방식으로 훼손, 보존, 전시 된다. 그녀의 '산/죽은' 몸은 이렇게 다시 시선의 대상이 된다.
죽음을 넘어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라는 신화는 그 자체로서는 남성중심적인 상징질서의 바깥에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시는 그 신화를 지독하고 끔찍한 사랑의 사건으로 만들어, 상징질서가 덧칠한 환상을 벗겨낸다. 그녀의 육체에 가해지는 훼손, 그 훼손의 너머, 죽음의 너머에서 그녀가 떠는 눈, '눈꺼풀 속의 사막의 밤하늘'은 그 길고 긴 폭력을 벗기는 과정이다. 그런데 마지막 두 연에서의 인칭은 모호하다. 삼인칭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화법에서 갑자기 숨은 일인칭이 등장한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 올려/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자는 누구인가? "꿈마다 여자가 따라"온다면, 그 꿈은 누구의 꿈인가? 앞의 「풍경의 눈빛」에서 소녀의 비명과 나의 비명이 연대를 이룬 것처럼, 모래 여자의 '꿈/악몽'은 '숨은 나'의 꿈속에서 다시 되살아난다. 길고 긴 기다림과 시선의 폭력을 넘어 다른 시간 속에서, 죽지 않고, '번쩍' 눈 뜨는 그녀.
ㅡ 이광호(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나, 그녀, 당신, 그리고 첫] 중에서 발췌.
「모래 여자」는 차분하게 정제된 언어를 보여주는 시다. 미라의 발굴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마치 미라의 발굴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여자의 존재를 조금씩 보여준다. 독자들은 숨을 죽이고 모래 여자가 어떻게 존재했고 어떤 취급을 받았으며 이제 어떤 모습으로 남았는가를 비밀의 베일을 펼치듯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 모든 모습이 드러났을 때, 독자들은 그 모래 여자가, 그 미라가 결국은 갖은 소외와 수모의 삶을 조용히 견뎌온 한 여성의 삶의 환유임을 알게 된다. 언어도, 상상력도 조용하지만 그러나 독특한 미학을 바탕으로 깊이 흐르는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모래 여자」는 어떤 면에서는 김혜순적이고, 다른 면에서는 김혜순이 아니다. 김혜순의 깊고 조용한 응시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고, 우리 시대 여성성의 한 기호가 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심사위원들은, 우리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은 다채로움보다는 조용함이라는 생각에서 「모래 여자」쪽을 조용히 선택했다.
ㅡ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수상작, 심사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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