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남자를 사랑했다. 공원 벤치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책을 읽는 남자. 책을 읽다 가끔씩 책 속에 숨어버리던 남자. 책 속에 들어가 오렌지 껍질을 벗기며 다시 책을 읽는 남자, 가끔씩 나를 읽던 남자, 내 입술에 담뱃재를 떨어뜨리던 남자, 내 가슴에 밑줄을 긋던 남자, 내 안에 책갈피를 끼워두던 남자, 가끔씩 나를 접어버리던 남자, 그러나 이제는 먼지 쌓인 책꽂이 한 켠에 꽂힌 남자, 헌책방에 치워버릴 수도 없는 남자.
* 해바라기 연대기, 랜덤하우스.
.......
안타깝게도 그는 "책 읽어주는 남자"가 아니라 "책 읽는 남자"다. 두 생물 간의 "항상성"은 불균형적이지 않을까. "남자"라는 보편적인 종의 차원으로 격상된 그 특수한 대상은 경쾌하게 반복.호명되지만 그가 현재형으로 되살아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담배를 피운 그는 아마도 그녀에게 키스를 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씨가 남아 있는 담뱃재처럼 뜨거운 상처 역시 남겼을 것이고, 가끔은 그녀를 외면했을 것이다. 모든 타인들은 이처럼 그녀의 책꽂이에 머무르며 그녀가 언제든 참조할 수 있는 사전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그녀의 시집 속에서 되살아난다.
ㅡ 허윤진(문학평론가), 작품해설 [환한 불면] 중에서, 발췌.
책을 숱하게 읽는, 읽어대는 남자는 필요치 않다.
책 읽어주는 한 명의 남자가 필요한 것이다.
(초록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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