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는 안녕하다
윤 석 정
새 떼가 몰려가는 저녁
바람 떼가 이마에 달라붙는다
파도 떼가 발등에 감긴다
매일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부서질 듯 부서지지 않고
튕길 듯 튕기지 않는
말랑말랑한 마음의 벼랑
넓고 가파른 벼랑이 바다를 끌어안는다
우리는 벼랑을 딛고 선다
영영 우리가 가닿을 수 없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한 세기를 보내는 동안
빙빙 제자리만 돌고 돌았거나
반듯한 선로(線路)만 내달렸다면
우리의 벼랑은 없다
바람 떼가 달려들어도
파도 떼가 휘감아도
뜬눈으로 지새운 밤들
백만 번의 굽이마다 흠뻑 젖은 얼굴들
이 세계 저 세계를 넘나든 심장들
낮이고 밤이고 묻고 또 묻는 안부들
우리는 벼랑에 꼿꼿이 선 등대이니
좌표를 잃은 바람 떼에게 길을 내주고
높이를 잃은 파도 떼를 내치지 않고
낮게 나는 새 떼를 수평선으로 보낸다
손발이 다 잘리고
살갗이 부풀다 사라질지라도
그렇게 우리는 벼랑이다
그렇게 우리는 안녕하다
_《청색종이》(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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