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그렇게 우리는 안녕하다 [윤석정]

초록여신 2022. 11. 9. 23:19


그렇게 우리는 안녕하다
윤 석 정
















새 떼가 몰려가는 저녁

바람 떼가 이마에 달라붙는다

파도 떼가 발등에 감긴다

매일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부서질 듯 부서지지 않고

튕길 듯 튕기지 않는

말랑말랑한 마음의 벼랑

넓고 가파른 벼랑이 바다를 끌어안는다

우리는 벼랑을 딛고 선다

영영 우리가 가닿을 수 없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한 세기를 보내는 동안

빙빙 제자리만 돌고 돌았거나

반듯한 선로(線路)만 내달렸다면

우리의 벼랑은 없다

바람 떼가 달려들어도

파도 떼가 휘감아도

뜬눈으로 지새운 밤들

백만 번의 굽이마다 흠뻑 젖은 얼굴들

이 세계 저 세계를 넘나든 심장들

낮이고 밤이고 묻고 또 묻는 안부들

우리는 벼랑에 꼿꼿이 선 등대이니

좌표를 잃은 바람 떼에게 길을 내주고

높이를 잃은 파도 떼를 내치지 않고

낮게 나는 새 떼를 수평선으로 보낸다

손발이 다 잘리고

살갗이 부풀다 사라질지라도

그렇게 우리는 벼랑이다

그렇게 우리는 안녕하다

 

 

_《청색종이》(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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