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밭을 지나며
나 희 덕
가을엔 나비조차 낫게 나는가
내려놓을 것이 있다는 듯
부려야 할 몸이 무겁다는 듯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달았던 사과나무,
열매를 다 내려놓고 난 뒤에도
그 휘어진 빈 가지는 펴지지 않는다
아직 짊어질 게 남았다는 듯
그에겐 허공이, 열매의 자리마다 비어 있는
허공이 열매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빈 가지에 나비가 잠시 앉았다 날아간다
무슨 축복처럼 눈앞이 환해진다
아, 네가, 네가, 어디선가 나를 내려놓았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사과나무 그늘이 환해질 수 있을까
꿰맨 자국 하나 없는 나비의 날개보다
오늘은 내 百結의 옷이 한결 가볍겠구나
아주 뒤늦게 툭, 떨어지는 사과 한알
사과 한알을 내려놓는 데
오년이 걸렸다
_《어두워진다는 》(창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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