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우체국에 가면 [이성미]

초록여신 2022. 10. 8. 06:03


우체국에 가려면
이 성 미










오늘도 우체국에 가지 않았다.
하루는 눈이 내렸고 하루는 아팠다. 하루는 늦잠에서 깨어 우체국이 너무 멀다는 생각을 했다.



우체국 대신 철물점에 가서 파이프를 샀다. 하루에 하나씩. 하루는 파이프로 피리를 불었고 하루는 파이프를 이어 좀 더 긴 피리를 만들었다. 하루는 이러다가 파이프로 오르간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봉투에 적는 주소가 하루마다 길어졌다. 한 글자 더/ 한 줄 더/ 번호가 더/ 주소가 길어져서 봉투를 더 주문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터널을 통과하고 내리막길을 내려가 우체국까지, 투명한 길을 그었다. 어제 우체국이 있던 자리에



오늘 우체국이 있어야 하는데 그곳에는 우체국이 없다. 또 하루가 지났기 때문에 우체국은 내게서 더 먼 쪽으로. 하루만큼 더 먼 쪽으로. 내가 하루에 걷는 길의 길이만큼 더.



우체국은 멀어졌다. 또 파이프를 사게 되었다. 이렇게 길고 기이한 피리를 불어도 될까. 부르튼 입술로 피리를 불어도 될까. 바람이 파이프 속으로 들어가 긴 바람이 되어 나올 수 있을까. 피노키오의 코는 부러지지 않던데.



검은 말들을 오늘밤 책에 뿌렸다. 책 위로/ 봉투 위로/ 검은 글자들 위로/ 밤이 내려앉았다.



내일은 우체국에 가야지.



밤늦게 눈이 내렸다. 길 위로/ 들판 위로/ 지붕 위로/ 눈이 하얗게 내려서. 검은 밤을 덮으며 눈이 하얗게 내려서. 길은 사라지고 사라진 길은 있고 우체국은 새하얘졌다. 내일은 우체국에 가야지. 좀 더 멀리.




_《다른 시간, 다른 배열》(문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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