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오동의 上部
나 희 덕
나는 어제의 풍경을 꺼내 다시 씹기 시작한다
6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아서
앞비탈에 자라는 벽오동을 잘 볼 수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오동꽃 사이로 벌들이 들락거리더니
벽오동의 풍경은 이미 단물이 많이 빠졌다
꽃이 나무를 버린 것인지 나무가
꽃을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꽃을 잃고 난 직후의 벽오동의 표정을
이렇게 지켜보는 것도 또다른 발견이다
꽃이 마악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일곱살 계집애의 젖망울 같은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풍경을 매일 꼭꼭 씹어서 키우고 있다
누구도 꽃을 잃고 완고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6층에 와서 벽오동의 上部를 보며 배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칠고 딱딱한 열매도
저토록 환하고 부드러운 금빛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이미 씨방이 닫혀버린 벽오동의 열매 사이로
말벌 몇 마리가 찾아들곤 하는 것도
그 금빛에 이끌려서일 것이다
그러나 저 눈 어두운 말벌들은 모르리라
캄캄한 씨방 속에 갇힌 꿈들이 어떻게 단단해지는가를
내 어금니에 물린 검은 씨가 어떻게 완고해지는가를
*어두워진다는 것(창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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