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마당
김 선 재
한때 이곳에 온 적이 있지만 지금 이곳은 아니다 지금은 다만 나무들의 입처럼 침묵해야 할 때 온몸으로 뒷걸음치는 누군가의 말을 받아내야 할 때
오늘은 이 계절의 말일 너는 이미 지나갔고 나는 다시 일찍 도착했다 가능하면 결말을 꿈꾸지 않아야 한다 좁은 하늘 위로 까맣게 날아가던 그때 새 떼들, 그들의 발자국이 어디서 사라졌는지 나는 모른다 계단 밑의 신발처럼 가지런한 행간이 어디서 어떻게 벌어졌는지 나는 모른다 검은 하늘 위로 하얗게 날아가던 그때 눈보라, 그것들의 온도가 어디서 바뀌었는지 나는 끝내 모른다 다만 눈보라에서 마음을 빼면 비가 될까
간결해진 것들이 울기 시작한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 내일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지난 계절의 꽃들이 대책 없이 지고 떨어진 꽃잎들이 속수무책 떨고 있다 어깨를 떨며 지나가는 네가 보인다 너무 늦게 떠난 너를 너무 일찍 도착한 내가 본다 어떤 말로도 너의 문장을 따라갈 수 없다 너는 나의 허수다 나는 너의 실수다 우리의 약수는 무한하고 무지한 셈이다 그러니까 비둘기의 울음소리에 정잡이 없듯이 지금 우는 것들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없는 셈이다
각자의 갈래에서 출발한 우리는 한때 이곳을 지나간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아니다 지금은 햇잎이 햇살처럼 돋아나는 때 가벼워진 사람들이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약속도 없이 집을 나서는 때
약속도 없이 이곳에 너무 일찍 도착한 내가 역광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때
* 얼룩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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