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의 탄생
김 선 재
지평의 먼 선 위를 아슬아슬 걸을 땐 얼룩이 돼야지 눈을 가리고 어둠의 일부가 되어 부분에서 전체로, 그 전체의 한 모서리로
목 짧은 새들의 능선을 따라 소리가 번지고 얼어붙은 물들이 한 몸을 허물 때
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출처가 된다
그건 내가 바라던 일이 아니야 바라는 건 오직 바람, 바람이 내 말들을 허공에 풀어놓았지 둘레 없는 우리 속에 방종한 양과 말 들이 뛰어놀던 날, 내 말들은 갈기를 휘날리며 사방으로 달아나요 양들은 마음대로 구름과 한 몸으로 떠나가요 나는 아직 어떤 말로도 너를 부를 수 없는데 날아간 말들이 멀리 사라져요 말도 없이 구름 울타리를 넘어가요
숲을 주세요
내 말은 발밑을 기어가
일요일을 돌려주세요
내 잠은 솜털처럼 사소해
내리는 눈이 눈 속에서 심연을 터뜨리며 물방울이 될 때
해변을 거슬러 온 구름이 네 얼굴에 슬픈 곡선을 그릴 때
너는 아름답게 태어나 나는 아름답게 죽는다
누군가 발등에 흘리고 간 눈물 같은 얼굴이 돼야지
눈에서 눈으로 전해진 풍경이 소식이 되는 날
두 번 다시 더해지지 않을
얼룩이 될 거야
* 얼룩의 탄생 / 문학과 지성사, 2012.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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