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의 시간
이 혜 미
물의 요일에, 창문으로 떠오르는 낯선 사람들을 소매 끝으로 문질러 지운다 방울져 떨어지는 얼굴들, 긴 여행에 지친 바람이 도착하고 다시 떠나갔다 바다 위로 포말처럼 떠다니는 이곳은 선상여관, 쓰여지지 않은 파도들이 몰을 떠는 곳 거품뿐인 맥주를 마시며, 나는 나에게 굳이 건배하지 않았다
둘러보면 온통 난파된 바람들, 영혼을 버리러 떠나는 사람들뿐이었다 조각배를 버리고 흠뻑 젖은 채 구조된 두루마리 속 이름들은 모두 한 움큼의 가명이었고, 방명록에 남긴 짧은 인사들처럼 죽거나 흩어지거나 어딘가로 스며들어 갔다 얼마나 더 사라져야 하는가, 흔들리는 물결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무릎을 모으고 그것만을 생각했다
바다를 어쩌지 못하여 몸이 범람하는 날도 있었다 투숙객들은 그것을 멀미라 불렀지만 나는 그 울렁임을 인어의 시간이라 불렀다 바다와 인간 사이에서 일렁이는 시간들…… 말을 버리고 꼬리를 버리고 물 밖으로 걸음을 옮기던 자의 비명이 수평선을 메우는 날이면 어김없이, 잃어버린 꼬리를 닮은 물비늘들이 해안에 가득했다
몸을 굽혀 파도를 줍는다 만개하는 거품들만이 머물 수 있는 유일한 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품이 사라지기 전까지 꼬리에 붙일 비늘을 다 모아야 할 텐데 몸을 허공에 놓아주는 동안, 밤의 모든 비늘은, 자신의 어두운 심장에 뜨겁게 칼을 박아넣은 자의 것이었다.
* 보라의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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