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보라의 바깥 [이혜미]

초록여신 2012. 3. 8. 05:21

 

보라의 바깥

이 혜 미

 

 

 

 

 

 

 

 

 

 눈 마주쳤을 때

 너는 거기 없었다

 

 

 물렁한 어둠을 헤집어 사라진 얼굴을 찾는 동안,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시선의 알갱이들이 쏟아진다 산산이 뿌려진 눈빛들이 나를 통과하여 사라져갔다

 

 

 나는 도망친다

 빛으로부터.

 

 

 눈을 감는 순간 빛은 갇히고 눈동자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그건 서로에게로 건너가려는 시간들, 오늘 죽인 나비를 태어나기 전부터 기다리는 일 새로운 명명법을 익힐 때마다 공기의 농도가 진해져갔다 점점 맑아지며 밖을 향해 솟아오르는 행성의 온도

 

 

 유리로 만든 베일을 쓰고 대기권을 바라본다 나는 이곳에 색(色)을 짊어지러 온 사람, 얼음조각 우연히 들어간 공기방울처럼 스스로 찬란할 수 있을까 관여할 수 없고, 무엇과도 연관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을 만져보는 순간, 세계는 투명하고 위태롭게 빛난다

 

 

 이제야 나는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눈을 감고

 몸 안을 떠다니는 흐린 점들을 바라본다

 발밑으로 빛의 주검들이 흘러내렸다

 

 

* 보라의 바깥 / 창비, 2011.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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