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라는 이름의 벌레
최 금 진
사는 건 줄기차게 도망을 하는 것이다, 우리 가문의 가훈이다
할아버지는 제 몸뚱이 하나만 달랑 지고
술항아리 속으로 달아나 가랑잎배 한 척 띄우다 가셨다
바람 빠진 바퀴와 녹슨 체인 소리를 내며 한강이 흐르는 서울
의식주가 아닌 식의주여야 하는 까닭을 깨닫느라
단벌 신사복 하나로 살아온 아버지는 항상 징그러웠다
월 이십만원짜리 셋방과 붙어먹은 후에 어머니는 서둘러 나를 낳고
사는 게 늘 팔차선 도로를 횡단하는 것 같았다고
재빨리 등을 보이는 버릇, 수준급이다
바닥까지 곤두박질쳤지만 우리는 바닥을 붙잡고 늘어졌다
해고, 실업, 복수 따위의 낱말들을 타고 다니며
우리 가족은 그렇게 벌레가 되어갔다
아버지의 망가진 자전거 같은 걸 타고 오실 구세주는 없었다
어머니 더러운 자궁에서라도 다시 들어갈 수 있다면
하수구와 한강이 윤회하는 서울을 벗어날 수 있을까
어둠이 반들반들 코팅된 우리 같은 얼굴들이
박멸되었으면 좋겠다고 믿는 관료들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애정결핍에 대하여, 스스로 벌레임을 인식하는 자의식에 대하여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아버지는 다행히도 무책임하다
원룸의 막힌 수챗구멍에서 올라오는 썩은 냄새를
긍정하자, 새로 만든 우리집 가훈이다
아버지, 우리를 이런 볕도 안 드는 곳에 버려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에게서 물려받은 벌레 형상을 껴입고 노동을 하고 오는 저녁
바퀴의 정체성은 끝없이 달아나는 데 있으니까
콘크리트처럼 굳은 발을 씻으면
이상하게도 달려가야 할 내일의 골목길이 식욕처럼 떠오른다
먹이를 향한 재빠른 자세로, 엎드리거나 비는 자세로
달려나가는 바퀴의 마지막 진화는 벌레라는 걸
저녁을 먹고 누우면 시계소리는 어제보다 더 바닥에 가까워지고
쥐며느리 같은 전철을 탄 사람들이
퉁퉁 부어오른 바퀴를 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
깨진 창문 밖으로 날아다니는 갑충 같은 별자리들이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처럼 아름답다
* 황금을 찾아서
…
시가 참 아프다.
시인은 더 아프다.
긍정하자,가 부정하자로 들린다.
바퀴라는 이름의 벌레라
참 아픈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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