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새들의 흰 이면지에 쓰다 [문인수]

초록여신 2012. 1. 25. 07:01

 

새들의 흰 이면지에 쓰다

시인 이원규의 집, '물마루'

 

 

 

 

 

 

 

 

 

 

그 사내는 이미 새의 종족, 지리산 아래 섬진강 가

여기저기 세 들어 산 지 오래되었다.

지금은 경상남도 하동땅 덕은리 언덕,

맹지(盲地) 위 옛 폐가에 산다.

일부러 저 먼 강 건너편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점찍었다는 언덕마루,

이 눈먼 땅에다 저의 눈을 두기로 한 것.

새가 둥지 틀  데를 고를 때 흔히 하는 객관식이다. 역시

섬진강의 필법이 잘 내려다보이는 물마루,

시퍼런 물굽이와 새하얀 모래톱이 서로 부드럽게 껴안아

태극문양을 이루는데, 저기 새들이 자주 논다.

놀거나 말거나 이 마루에선

자잘한 새 발자국들 전혀 보이지 않아

백사장은 늘 깨끗하고 물은 계속 새것이다.

그는 강물을 찍어 백사장에다 쓴다.

무리를 버린 새, 무리의 울음을 좇아

오토바이를 타고 날아가는 촌철의 사내가 있다.

 

 

 

* 적막 소리 / 창비, 2012.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