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의 흰 이면지에 쓰다
시인 이원규의 집, '물마루'
그 사내는 이미 새의 종족, 지리산 아래 섬진강 가
여기저기 세 들어 산 지 오래되었다.
지금은 경상남도 하동땅 덕은리 언덕,
맹지(盲地) 위 옛 폐가에 산다.
일부러 저 먼 강 건너편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점찍었다는 언덕마루,
이 눈먼 땅에다 저의 눈을 두기로 한 것.
새가 둥지 틀 데를 고를 때 흔히 하는 객관식이다. 역시
섬진강의 필법이 잘 내려다보이는 물마루,
시퍼런 물굽이와 새하얀 모래톱이 서로 부드럽게 껴안아
태극문양을 이루는데, 저기 새들이 자주 논다.
놀거나 말거나 이 마루에선
자잘한 새 발자국들 전혀 보이지 않아
백사장은 늘 깨끗하고 물은 계속 새것이다.
그는 강물을 찍어 백사장에다 쓴다.
무리를 버린 새, 무리의 울음을 좇아
오토바이를 타고 날아가는 촌철의 사내가 있다.
* 적막 소리 / 창비, 2012.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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