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올 들어 [김성대]

초록여신 2010. 12. 31. 23:08

 

 

 

 

 

 

 

 

 

 

 

올 들어 가장 따뜻한 날

올 들어 가장 긴 식사

새는 울지 않고

떨어지는 잎을 들려준다

한 잎 또 한 잎

 

 

올 들어 가장 긴 목욕

올 들어 가장 가벼운 공기

하얀 공기 둘 누워 있다

올 들어 처음으로 듣는 낮달

처음으로 녹는 아이스크림

 

 

올 들어 가장 이른 기일

올 들어 가장 느린 해

넓은 잎을 가졌던 나무의 음악과

우리의 그림자가 만날 때

저편의 시간을 들어 보기도 하는 것

 

 

올 들어 가장 고요한 골목

올 들어 가장 선명한 창

날짜를 잘못 기억하고

자신의 집을 몰래 바라보는 것

구두는 뒤로 놓여 있다

 

 

올 들어 가장 적은 강수량

올 들어 가장 천천히 타는 향

따뜻해지면서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면서 고요해지는

올 들어 가장 잊기 좋은 날

 

 

 

 

*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민음사(2010)

 

 

 

올 들어 가장 사색이 깊은 오늘,

올 들어 가장 후회가 많은 오늘,

올 들어 가장 천천히 갔으면 하는 오늘,

올 들어 가장 문자메세지를 많이 보냈던 오늘,

올해의 마지막 날에…

(2010년을 보내며, 초록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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