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우주선의 추억 [김성대]

초록여신 2010. 12. 30. 11:29

 

 

 

 

 

 

 

 

 

 

1

 우리는 지구에 너무 늦게 남았다

 대기를 떠다니는 음성들

 열대의 겨울숲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과오와 우리의 외마디를 계속 들어야 하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백미러 안의 소음

 끊임없는 통화음과 부재음

 모든 것이 리플레이되고 있다

 곤충의 눈알 같은 열대의 눈을 맞으며

 서로를 되비추고 있을 뿐

 우리 자신에게 착지할 수 없지

 인간이 불필요한 지구에서

 너무 늦게 남은 우리는

 신의 망설임을 느낀다

 이 모든 게 우연이었으면

 

 

2

 우리는 지구를 너무 늦게 떠났다

 가게에 가다가 기차를 탄 것처럼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는 과거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지

 지루한 우주 영화 수천 편이 반복되는 것처럼

 우주는 고요하고 가시감조차 없는 과거들

 하나의 우연조차 바뀌지 않았지

 누군가의 까만 눈 속 같은 거기에서

 우리는 끝없이 낙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몸을 싣기 위해서

 우리의 속도는 역시 미미해야 했지

 우리는 언젠가 눈을 가리고 우주를 떠돌던 일들이 모두 기억났다

 

 

3

 우리는 떠나면서 숲의 등불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우주선이 숲에서 멀어져

 등불이 겨우 보일 때까지

 멀어지고 멀어져

 등불이 겨우 보이는 곳에서

 우리는 가물거리는 등불 아래를

 네발로 걷는 인간을 보았다

 오래도록 차가운 중력에 길들여진

 우주선의 우리와 같은

 

 

 여기도 지구였다

 

 

4

 아직 여기가 보이는지 모르겠군… 거기서 본 여기는 어떻던가… 어느 계절일지 알 수 없는…… 열대의 눈이 내리고 있네… 고요한 결빙……… 얼음을 딛고 날아간 새들은…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네…… 기나긴 결빙을 지나…… 결빙의 순간들을…… 나누고 나누면…… 여기가 바다였다는 걸… 알기나 할까…… 자네의 머나먼 복귀 또한…… 어쩔 수 없이 빈약한… 재구성이겠지…… 실종이라고……… 단정 짓지 말게… 공기가 얼어 가는 소리…… 지상의 마지막 데시벨일지도 모르겠네……… 자네가 거기…… 없더라도 괜찮네……… 전할 말이………

 

 

 

*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 민음사, 2010.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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