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꽃이 졌다는 편지 [장석남]

초록여신 2010. 9. 1. 21:41

 

 

 

 

 

 

 

 

 

 

1

이 세상에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야윈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써야 할까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달이 뜨면

누군가 아이를 갖겠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대로 써야 할까

 

 

2

꽃 진 자리에 나는

한 꽃 진 사람을 보내어

내게 편지를 쓰게 하네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잘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그 바람에

뺨을 기대보기도 한다고

 

 

나는 오지도 않는 그 편지를

오래도록 앉아서

꽃 진 자리마다

애기들 눈동자를 읽듯

읽어내고 있네

 

 

 

 

 

 

* 젖은 눈 / 문학동네, 2009. 4. 20 (개정판)

 

 

  

自序

 

오,

저 물 위를 건너가는 물결들

처럼,

 

 

서른넷, 初

장석남

 

...

 

개정판을 내며

 

십여 년 전 냈던 시집을 다시 내게 된다.

아주 없어지는 것이 조금은 섭섭했던 모양이다.

몇 작품에서 문장 몇 줄을 지웠는데 두어 작품은 다 지워졌다.

다시 본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또렷이 보인다는 것.

얼른 덮었으니 망정이지 남는 것 있었을까 싶다. 허나

문장을 남김으로써 스스로를 지우는 방식이 문학이 아니겠는가.

마저 지우는 공부가 계속될 뿐이겠다.

 

 

마흔다섯, 初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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