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음악처럼, 비처럼 [안현미]

초록여신 2009. 7. 19. 10:11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쑬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봐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

춘천을 떠나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눈썹에서 주워온 몇 개의 비애를 안주로 비루를 마실 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백조는 물 위에서 뒤뚱뒤뚱,

그 뒤뚱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아직도 찬송가처럼 몇 개의 빗방울 흩뿌리고 있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 곰곰 / 랜덤하우스중앙, 2006.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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