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바다풀 시집 외 2편 [김선우] 2009 제24회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초록여신 2009. 5. 17. 04:12

 

 

 

 

 바다풀 시집

 

 

백수인 걸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 없어요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안 해보고 살았죠

출퇴근, 이런 말이 나오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도망다녔죠 굶지 않을 만큼만 글 써서 벌고

죽지 않을 만큼만 여행할 수 있으면 족했죠

그런데 이제 취직하고 싶어요

생애 최초의 구직 욕망이에요(아, 살짝 뿌끄러워요)

 

 

바다풀로 종이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하고 싶어요

바다풀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발명되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내 손이 이력서를 쓰고 있어요

 

 

나무들의 유령에 쫓겨 발목이 자꾸 끊어지는

잊을 만하면 덜컥 나타나는 악몽이 지겨워요

청동구두 같은 종이구두가 무서워요(저 좀 들여보내주세요)

 

 

바다풀로 만든 종이로 시집을 묶고 싶어요

나무들에 대한 진부한 속죄는 말고

다가올 결혼식까지 속죄하긴 싫으니까

바다풀 냄새 가득한 공장에 취직하고 싶어요

바다풀 시집 자서自序엔 딱 세 줄만 쓸 거예요

 

 

나무의 피 냄새가 가시지 않아 아주 지겨운 날들이었어.

나는 그만 손 씻을래.

너를 사랑해.

 

 

 

구석 그리고 구석기 홀릭

 

 

 나, 구석 홀릭이 있어 그녀가 말하고 나는 춤춘다 응? 구석기 홀릭? 나는 사로잡혔어 최초의 동굴벽화를 그린 손에

 

 

 큰 달님을 그려야지 아직 계급이 나뉘지 않았을 사냥한 물소를 골고루 나누던, 흰 물소의 영혼이 우리를 용서하던 때

 

 

 구석에서 그녀가 푸르르 몸을 떤다 달의 중심으로 날아가 박히는 깃털들, 살이 점점 무거워져...... 이러다 나는 법을 영영 잊겠어...... 잠이 와...... 그녀가 구석에 스르르 주저앉는다 나, 구석 홀릭이 있어 구석엔 구겨져도 아픔을 모르는 착한 혼魂들이 살지

 

 

 큰 달이 뜬 들판에서 춤을 추며 꽃을 따던 구석기의 여자를 생각하네 나는 생각하고 그녀는 구겨지네 너는 은빛 늑대의 혼을 걸쳐도 좋으련만 너는 은빛 속에 고운 잠, 들어도 좋으련만

 

 

 불면이 깊은 그녀는 구석 홀릭, 비틀거리며 잠을 자러 구석으로 오지만 45억 살 중 1억 살도 먹지 않은 오늘의 은빛은 차가워 백만 년의 은빛은 벌거숭이라 아직 추워

 

 

 나는 말하고 그녀는 춤춘다 구석 홀릭의 무거운 혼, 구석기의 잠 속에서만 우리는 춤춘다

 

 

 

 

목련 열매를 가진 오후

 

 

목련 꽃을 사랑하는 이에게

목련 열매를 마저 보여주어라

 

 

꿈지럭거리며 허물 벗는 무섬증 같은

 

 

여러 개의 심방을 가진 심장

분열하는 붉은 열매를 찢고

 

 

꽃이 사뿐 날아오를 때

 

 

꽃을 기억하는 사람의 꽃이 아니라

꽃이 기억하는 열매까지 보여주어라

 

 

꽃으로 보여주어라

 

 

 

 

* 2009 제24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우수상 수상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