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 익는 시간
당신은 내게 비단을 주어
비단을 딱 한 필만 주어
그걸 눈에 두르고
더듬어서 내 맘속 둥그런 항아리 속으로나 들어가보게
그 항아리에 늘 허공이나 담아두는 당신의 뜻을 모르니
붉은 비단이나 두 분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면 알려나?
하늘이 온통 노을로 꽃핀
이 부러진 듯 시디신 석류 익는 시간
방
동백꽃이 피었을 터이다
그 붉음이 한 칸 방이 되어 나를 불러들이고 있다
나이에 맞지 않아 이제 그만 놓아버린 몇 낱 꿈은 물고기처럼 총명히 달아났다
발 시려운 석양이다
이제 나는 온화한 경치처럼 나지막이 기대어 섰다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 벽을 두른다
동백이 질 때 꽃자리엔 어떤 무늬가 남는지
들여다보는, 큰 저녁이다
문 없어도 시끄러움 하나 없이
들끓는 방이다
바위 그늘 나와서 석류꽃 기다리듯
바위 곁에 석류나무 심었더니 바위 그늘 나와서는 우두커니 석류꽃 기다리네
장마 지나 마당 골지고
목젖 붉은 석류꽃 피어나니
바위는 웃어
천년이나 만년이나 감춰둔 웃음 웃어
내외內外하며 서로를 웃어
수수만년이나 아낀
웃음을 웃어
그러니까
세상에 웃음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울음도 생겨나기 이미 전부터
둘의 만남이 있었던 듯이
우리 만남이 있었던 듯이
* 2009 제24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우수상 수상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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