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단편, 봄날은 간다 [이덕규]

초록여신 2009. 4. 23. 08:41

 

 

 

 

 

 

나른한 봄날

인적 드문 산사에 올랐다가

뒤꼍 작은 암자 앞 댓돌 위에

남자 흰 고무신과

굽 높은 여자 검은 하이힐이

나란히 올려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순간, 빠르게 돌아가는

영사기 필름 부하 걸리듯

마당 끝 미륵불 펄떡거리는 심장

피돌기 급류에 휩쓸려

나는 멀리 앞산 중턱

가설 스크린 하얗게 둘러치고

한창 상영 중인 산벚나무

한바탕 단꿈 속으로 젖어드는데

 

 

저런, 언제나 그렇듯

달콤한 꿈은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가 문을 확 열어젖히거나

열 받은 필름이 맥없이, 툭, 끊깁니다

 

 

무슨 스토리였을까요

캄캄한 암자 안을 향해

공손히 합장하고 돌아서

산 아래로 목련꽃 지듯 내려서는 여자

그새 눈매가 많이 젖었습니다

 

 

 

 

* 밥그릇 경전, 실천문학사(2009)

 

 

 

 

.......

예끼!

발칙한 상상을...

중편이 되지 못하고 단편에 멈춘 채,

그렇게 그렇게 봄날은 가지요.

(봄날은 가고 있음에, 초록여신)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고영민]  (0) 2009.04.23
헌 신 [복효근]  (0) 2009.04.23
나에게 기대올 때 [고영민]  (0) 2009.04.18
봄 외출 [장옥관]  (0) 2009.04.17
봄날이었다 [장옥관]  (0) 2009.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