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백년 동안의 소풍 [백상웅]

초록여신 2009. 2. 21. 11:28

 

 

 

 

 

 

 

 

 

 

백년 전엔 없던 물렁한 언덕이었어

나무들이 천막을 치니 꽃그늘이 통째로 빨래하러 가는 거야

눈곱 떼던 복숭아 꽃망울도 저수지 쪽으로 기어가던 참이야

 

 

벌떼가 꽃송아리를 하늘에 꽁꽁 꿰매어놓아도 꽃잎이 세상에 분홍주름을 자꾸 만드니까,

흑염소 떼가 뿔을 세우고 쇳소리 내며 몰려왔어

 

 

백년 만에 봉봉세탁공장 천막이 세워졌어

안과 밖이 헷갈리는 투명한 벽을 드나드는 염소 떼,

국적은 다르지만 얼굴이 닮은 그늘이야

돗자리 위에 앉아 까맣게 수런대고 있어

소풍 와서 수면을 다림질하고 있는 거야

 

 

붓 같은 수염들의 웃음은 볕에 잘 익은 청동빛깔,

삽겹살을 굽다가 서툰 젓가락질처럼 웃는 거야

물에 뜬 능선을 따라 자맥질하는 물오리같이 입을 벌리데

천막 아래선 복숭아나무 여권 없는 어린 뿔이 알음알음 말을 놓는 거야

쨍쨍한 놋쇠근육들도 나무들과 말을 트고 맨발이 되는 거야

하늘의 얼룩을 불법으로 지우던 흑염소 떼,

주름진 하늘의 귀퉁이를 펼쳐 언덕에 널어놓았어

 

 

펄럭이는 것은 때가 빠진 언덕이야

살갗 부딪치는 소리가 저수지에 물결을 일으키데

왜 거뭇거뭇한 사랑은 방울 흔들며 언덕을 넘지 못하지?

나무껍질 같은 얼굴에 꽃잎이 내려앉아 흑염소 떼의 나라는 백년동안 찾을 길이 없어

강철손이 보송보송 말라가는 하늘을 주무르고 있는 언덕이야

 

 

 

ㅡ등단작 『창작과 비평』, 2008

 

 

 

 

* 2009 젊은 시, 문학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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