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시인 70인

봉지밥 [이병률]

초록여신 2009. 2. 7. 20:44

 

 

 

 

 

 

 

 

 

 

봉지밥을 싸던 시절이 있었지요

담을 데가 없던 시절이었지요

주머니에도 가방에도 넣고

가슴팍에도 품었지만

어떻게든 식는 밥이었지요

 

 

남 몰래 먹느라 까실했으나

잘 뭉쳐 당당히 먹으면 힘도 되는 밥이었지요

 

 

고파서 손이 가는 것이 있지요

사랑이지요

담을 데 없어 봉지에 담지요

담아도 종일 불안을 들고 다니는 것 같지요

 

 

눌리면 터지고

비우지 않으면 시금시금 변해버리는

이래저래 안쓰러운 감정의 형편이지요

 

 

다 비운 봉지를 뒤집어

밥풀을 떼어먹느라 봉지 안쪽을 받치고 있는 손바닥은

사랑을 다 발라낸 뼈처럼

도무지 알 길 없다는 표정으로 말갛지요

 

 

정해진 봉지에

더 비우거나 채워야 할 부피는 무언인지요

눈발이 닥치더라도 고프게 받아

잘 뭉쳐놓으라는 이 요구는 무엇인지요

 

 

바람이 빈 봉지를 채간다고

사랑 하나를 치웠다 할 수 있는지요

 

 

봉지를 끌고 가는

이 바람의 방향을 외면하는 것으로

사랑 하나 비웠다 할 수 있는지요

 

 

 

 

 

* 현대문학 55주년 기념 연재 (월,수, 금 연재) / 한국대표시인 70인 - 시, 사랑에 빠지다

 

 

   2009. 0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