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김기택]

초록여신 2009. 2. 4. 10:43

 

 

 

 

 

 

 

 

 

마흔이 넘은 그녀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오빠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중년의 얼굴에서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뛰어나왔다.

 

 

작고 어리던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나왔구나.

긴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놓았구나.

 

 

삼십여 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다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 소, 문학과지성사(2005)

 

 

 

.......

소녀를 아줌마가 되게 할 수 있는 게 세월인 게다.

그래도 세월을 빗겨간 '오빠'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30여 년의 세월을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단어의 힘.

다정함 그 속에는 예전의 소녀와 웃음과 그리움이 묻혀 있다.

가족의 울타리 앞에서 중년으로 돌아가는,

소녀가 흔한 아줌마가 되어야만 하는,

소년 또한 아저씨가 되어있었을 테고,

오빠 또한 그 세월의 힘 앞에 나이테를 잉태했으리라.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한,

아저씨가 된 소년을 위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오빠'라는 단어 속에 파릇파릇 청춘을 발산하고 있었다.

추억은 그러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오빠, 갈게...

그 여운이 메아리친다.

다시 소녀가 되기 위해 '오빠'라는 단어를 마음껏 불러보자.

(꿈꾸는 소녀를 위하여, 초록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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