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넘은 그녀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오빠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중년의 얼굴에서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뛰어나왔다.
작고 어리던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나왔구나.
긴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놓았구나.
삼십여 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다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 소, 문학과지성사(2005)
.......
소녀를 아줌마가 되게 할 수 있는 게 세월인 게다.
그래도 세월을 빗겨간 '오빠'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30여 년의 세월을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단어의 힘.
다정함 그 속에는 예전의 소녀와 웃음과 그리움이 묻혀 있다.
가족의 울타리 앞에서 중년으로 돌아가는,
소녀가 흔한 아줌마가 되어야만 하는,
소년 또한 아저씨가 되어있었을 테고,
오빠 또한 그 세월의 힘 앞에 나이테를 잉태했으리라.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한,
아저씨가 된 소년을 위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오빠'라는 단어 속에 파릇파릇 청춘을 발산하고 있었다.
추억은 그러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오빠, 갈게...
그 여운이 메아리친다.
다시 소녀가 되기 위해 '오빠'라는 단어를 마음껏 불러보자.
(꿈꾸는 소녀를 위하여, 초록여신)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투명인간 [여태천] (0) | 2009.02.05 |
---|---|
연하장 [박용하] (0) | 2009.02.05 |
스윙 [여태천] (0) | 2009.02.04 |
[견자] ....... 박용하 (0) | 2009.02.04 |
견자見者 ....... 박용하 (0) | 2009.02.04 |